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91년 9월 12일


경마가 없는 날. 정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묘하다. 헤밍웨이에게 투우가 필요했던 까닭을 난 안다.

그에게 투우는 삶이라는 그림을 끼울 액자 같은 것으로, 자기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일깨워주었으리라.

때때로 그걸 우린 잊어버린다. 기름 값을 지불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등등에 정신이 팔려서.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 제 자신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사람들에게 죽음은 충격이고 공포다. 뜻밖의 엄청난 사건 같다. 옘병, 

어디 그래서 되겠나. 난 죽음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때때로 꺼내서 말을 건다. 

"이봐, 자기, 어찌 지내? 언제 날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하고 있을게."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애도할 일이 아니듯, 죽음도 애도할 일이 아니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인간들이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하는 삶이다. 

인간들은 제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제 삶에 오줌을 싸댄다. 

제 삶을 똥 싸갈기듯 허비한다. 멍청한 씨댕이들, 


그들은 씹질, 영화, 돈, 가족, 그리고 또 씹질, 따위에 너무 몰입한다. 그들 머릿속엔 솜만 꽉 찼다. 

그들은 하느님을 아무 생각 없이 꿀꺽 삼키고, 국가도 아무 생각 없이 꿀꺽 삼킨다. 

그러다 금방 그들은 생각하는 법마저 잊어버리고, 생각도 남들이 대신 하라고 내맡긴다. 골통엔 솜만 꽉 찼다.  

그들은 생긴 것도 추하고, 말하는 것도 추하고, 걷는 것도 추하다. 

수세기 만에 한 번 나올 법한 위대한 음악을 틀어줘도 들을 줄을 모른다. 

대다수 인간들의 죽음은 짝퉁이다. 죽을 게 남아 있어야 말이지.



91년 10월 9일


날 차에 태워 끌고 가던 FBI 녀석들이 골을 내던 게 기억난다. 

"야 이 친구 제법 쿨한데!" 

한 녀석이 성질이 나서 버럭 소릴 질렀다. 

내가 왜 붙잡혔는지, 날 어디로 끌고 가는지 난 묻지 않았던 것이다. 


난 그냥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의미 없는 인생의 그저 또 다른 단면이었을 뿐. 


"잠깐," 내가 말했다. "난 무섭소." 

그 말에 그들은 기분이 좀 좋아지는 듯했다. 

그들은 내게 외계인 같았다. 우린 서로 관계 맺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난 아무 느낌도 없었으니까. 

뭐, 딱히 이상하다고 내가 느꼈다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상했다는 거다. 


난 그저 손들, 발들, 머리들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무언가 이미 마음을 정했고, 난 그들의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난 정의나 논리 따윈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게 내 차지가 된 적은 없었다. 

저들이 무슨 수를 써본들 전체 구조는 결코 의미 있는 것으로 변하지 않을거다. 

아무 것도 없는데 뭘로 좋은 걸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그 자들은 내가 겁내는 꼴을 보고 싶었던 거다. 그들에겐 그게 익숙하니까. 

난 그저 넌더리가 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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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3


두 남여가 독방에 갇혔다.

남자의 나이는 58, 여자의 나이는 47이다.

키스를 하는 걸 17살 남자아이가 목격했고

아이는 그 댓가로 믹스커피 1개를 받았다.

두 남여는 독방에 갇혔고, 시계는 없고, 불은 꺼지지 않는다.



41세 여자는 두 다리가 없다.

아무도 여자에게 커피를 주지 않았다.

그 여자의 머리는 백발이다.

여자는 날마다 찬송가를 부른다.



한 48세 카우보이가 말했다.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 아닙니까?



48세 카우보이는 노래를 불렀다.

백발의 여자 앞에서

다비치의 괜찮아 사랑이야



59세 남자는 숫자를 모른다.

늘 번호가 적힌 쪽지를 내밀면

전화를 대신 걸어준다.

늘 같은 번호,

2달째 여자, 혹은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재판에서 벌금형 300만원을 받은 51세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여긴 꼭 감옥 들어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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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5



황혼 속으로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둠이 자욱히 깔려 있었다

그래서 계속, 황혼 속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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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21


레이하네 자바리


"나를 위해 검은 옷을 입지 마세요. 내 괴로운 날들은 잊고 바람이 나를 데려가게 해주세요."


http://www.huffingtonpost.kr/2014/10/27/story_n_60522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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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지하 감옥의 나쁜 공기가 차츰 쥘리엥에게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다행이 쥘리엥의 사형 집행 날에는 찬란한 햇빛이 만물에 즐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쥘리엥도 굳건한 용기가 솟았다.

그에게는 대기 속을 걸어 나가는 것이 오랫동안 바다에 나가 있던 항해자가 육지를 산책하는 것처럼 상쾌한 느낌이었다.

자, 만사가 잘되어 나간다. 나도 조금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잘려 나가려는 그 순간만큼 그 머리가 그렇게 시적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한때 베르지의 숲 속에서 지냈던 가장 감미로운 순간들이 한꺼번에 그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끝났으며 쥘리엥은 아무런 가식 없이 최후를 마쳤다.


하루는 그가 푸케에게 이런 말을 했다.

"누가 알겠나? 어쩌면 우리가 죽은 후에도 감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베리에르를 굽어보는 높은 산의 그 작은 동굴에서 쉬고 싶네. 쉰다는 말이 지금 심경에 어울리는 말이야. 자네에게도 몇 차례 얘기했지만, 밤에 그 동굴 속에 들어가 프랑스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지방의 경치를 멀리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야망이 내 가슴을 불태웠지, 그때는 야망이 내 정열이었으니까... 요컨대 그 동굴은 내게 아주 소중한 곳이야. 그리고 그 동굴의 위치는 철인의 마음이라도 끌 만큼 훌륭하다는 걸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걸세.... 그런데 브장송의 수도회 사람들은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는 사람들이니까 자네가 잘만 하면 그들은 내 시신을 자네에게 팔기라도 할 거야..."

푸케는 그 슬픈 거래에 성공했다. 

그는 친구의 시신을 옆에 놓고 자기 방에서 혼자 밤을 세우고 있었다. 그때 놀랍게도 마틸드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는 브장송에서 4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마틸드를 남겨두고 온 길이었다. 마틸드의 눈초리가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를 보고 싶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푸케는 말할 용기도 일어설 기력도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마루위에 놓인 커다란 푸른 망토를 가리켜 보였다.

그 속에 쥘리엥의 시신이 싸여 있었다.

그녀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보니파스 드 라 몰과 마르그리트 드 나바라의 기억이 아마 그녀에게 초인적인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망토를 열었다. 푸케는 고개를 돌렸다.

서둘러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마틸드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촛불을 여러 개 켜놓았다. 

푸케가 힘을 내어 그녀를 쳐다보니,

 마틸드는 자기 앞의 작은 대리석 탁자 위에 쥘리엥의 머리를 올려놓고 그 이마에 키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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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19

 


내가 아니라 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손을 본 정보나, 내가 전봇대를 본 정보나 뇌 입장에선 마찬가지다.

똑같은 시각적 정보일 뿐이다.

다만 나의 손, 저기 보이는 전봇대라는 뇌의 해석이 갈릴 뿐이다.

집중해야 할 부분은 해석이 아니다. 즉 출력이 아니라 입력되는 부분이다.


결국 손이나 전봇대나 똑같은 외부자극이고 내 손이라는 해석은 뇌가 지어낸 것이다.

모든 것들이 마찬가지다.

민감한 사람들은 남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낀다.

자식 가진 부모들이 그러하다. 자식이 아프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만큼 많은 정보들이 입력되기 때문이다.

남의 고통이나 나의 고통이나 뇌로 들어가는 외부자극 이라는 메카니즘은 같다.

키보드로 입력하든 블루투스로 멀리서 입력하든 피씨 입장에서는 처리해야 할 정보값이다.

그냥 편의에 따라서 피씨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모아서 내 컴퓨터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샌 컴퓨터가 진화해서 클라우드로 되고 있다. 

니컴퓨터 내컴퓨터가 사라지고 하나의 컴퓨터가 되어가고 있다.


모든 '나'라는 인식은 정보값을 입맛에 맞게 만들어 낸 것이다.

입력이 아닌 출력측의 결과일 뿐이다.

입력측에서 보면, 전봇대를 보는 정보값과 거울에 비친 나를 정보값, 두가지를 뇌가 인식하는 메커니즘은 같다.

내가 전봇대고 전봇대가 나다.

너가 나고 내가 너다.

하늘이 나고 내가 하늘이며 

하늘에서 떨어진 비가 피부에 맞닿는 간지럼 역시 나다.


나의 팔, 나의 다리 이런건 본질적으로 보면 없다.

팔에 마취를 하면 피가 철철나도 알지를 못한다.

뇌로 정보가 들어가지 않는다.

피가 철철나는 팔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아이고 내 팔이야' 하는 아웃풋이 나온다.


'나'는 그냥 뇌가 편리하니까 지어낸거다.

게임 속에선 내 캐릭터만 움직여야 편리하다. 하지만 가짜다.

내 캐릭터는 없고 게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없고 우주가 있을 뿐이다.

뇌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정보들이 나다.

나는 무한히 확장된다.


나의 마음, 나의 사랑 이런 것 역시 없다.

우주 속에 나는 없다.

절망할 일은 아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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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이상하게도 요즘들어 그 시절이 자꾸 생각난다.

막사 뒤 빨랫감을 널어놓고 총총 들어오며 보았던 검푸른 하늘

차가웠던 공기와 순박했던 친구의 얼굴,

다음날 빨래들이 빳빳히 얼거란 생각은 못한채 모두가 바보처럼 웃던 모습들

서로의 귀지를 파주며 웃던 아이들 그위로 빛나던 무수히 많은 별들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지옥이었다.

여름이면 반딧불이 날아다니고 가을이면 무당벌레 날아오던 곳

해가지면 끝없이 떠오르던 이름모를 별들

독수리를 잡던 까치들

어둠속에 빛나던 올빼미의 노오란 눈

지독히리만큼 적막한 고요

고요를 이겨보려 흥얼거리던 아이들

갈대와 새들의 노래, 춤을 추던 나무들


매일밤 얇아지고 다시 차오르는 달을 보며 해왔던 수많은 상념들

이별을 말하며 떠나가던 미소들

다시는 볼 수 없던 미소들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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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쓰지 말고

모든 생물을 그 어느 것이나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갖고자 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이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른다.

연정에서 우환이 생기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친구를 동정한 나머지 마음이 얽매이면 손해를 본다.

가까이 사귀면 이런 우려가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애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즐겁게 하고,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마음을 산산이 흐트러 놓는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러한 우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이 내게는 재앙이고 종가이고 화이며

병이고 화살이고 공포다.

이렇듯 모든 욕망의 대상에는 그러한 두려움이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치 어깨가 떡 벌어진 코끼리가

그 무리를 떠나 마음대로 숲속을 거닐 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임을 즐기는 이에게는

잠시 동안의 해탈에 이를 겨를이 없다.

태양의 후예가 한 말씀을 명심하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다투는 철학전 견해를 초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결론에 도달하여 도를 얻은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남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도 말며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벗을 멀리 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에게 가까이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이나 쾌락에 만족하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은 집착이구나.

이곳에는 즐거움도 상쾌한 맛도 적고 괴로움뿐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낚시이다. 라고 깨닫고

현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는 것처럼

또는 불이 다 탄 곳에는 다시 불 붙지 않는 것처럼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러러 보거나 헤매지 말고

모든 감관을 막아 마음을 지켜 번뇌가 이는 일 없이

번뇌의 불에 타지도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음의 다섯 가지 덮개를 벗겨 버리고

모든 수번뇌를 잘라버려 의지하지 않으며

애욕의 허물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전에 경험했던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리고

또 쾌락과 우수를 버리고

맑은 고요와 안식을 얻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빨이 억세어 뭇짐승의 왕이 된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종벽한 곳에 살기를 힘쓰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간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매임을 버리고

매듭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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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사랑하는 요하네스!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이제 모든 것이 너무 이상하게 여겨져. 나는 너한테 편지를 쓰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아.  나는 그것을 방해하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전에, 내가 아직 활기에 넘쳤을 때라면 너한테 편지를 쓰기보다는 차라리 밤낮으로 괴로워했을 거야. 하지만 이제 나는 죽음을 앞두고 있고, 더 이상 그런 식으로는 생각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내가 피를 토하는 걸 보았고, 나를 진찰한 의사는 내 한쪽 폐가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대. 그런데 왜 내가 더 이상 당혹스러움을 느껴야 하지?

  나는 여기 침대에 누워서 너한테 한 마지막 말들을 생각했어. 그날 저녁 숲 속에서였지. 그때는 그게 나의 마지막 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작별 인사를 하고 너한테 고맙다고 했을 거야. 이제 나는 두 번 다시 너를 못 볼 테니까. 내가 너를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사랑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네 발치에 몸을 내던지고 네 구두와 네가 밟았던 땅에 입 맞추지 않은 것을 지금 사과할게. 나는 어제와 오늘 여기 누워 있으면서, 내가 이곳을 떠나 다시 집에 가서 숲 속을 거닐며 네가내 두 손을 잡았을 때 우리가 앉아 있었던 곳을 찾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 그러면 나는 거기에 누울 수 있고, 너의 흔적을 찾아 그 주위의 모든 풀잎에 입을 맞출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집에 갈 수 없어. 엄마는 내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조금이라도 좋아지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어.

  사랑하는 요하네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은 세상에 태어나 너를 사랑하고 이제 생명에 작별 인사를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해. 여기 누워서 날과 시간을 기다리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상상해봐. 나는 생명과 길거리의 사람들, 마차가 덜거덕거리는 소리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고 있어. 다시는 봄을 보지 못할 거야. 이 집들과 거리와 공원의 나무들은 내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겠지. 오늘 나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서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어. 길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걸 보았는데, 그들은 모자를 들어 올리고 악수를 나누고 무슨 말인가를 하고 소리 내어 웃었어.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얼마 없어 죽을 거라고 생각하자 너무 이상했어. 저기 있는 저 두 사람은 내가 여기 누워서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라. 하지만 알았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악수를 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거야.

  어젯밤에 나는 마지막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어. 내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고, 멀리서 영원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긴 여행에서 돌아왔고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어. 그 느낌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 하지만 엄마는 내가 들은 소리가 고향의 강물 소리와 폭포 소리였을 거라고 생각하셔.

  요하네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하지만 나는 그걸 한 번도 너한테 보여주지 못했어. 나 자신의 천성 외에도 장애가 너무 많았지. 아빠도 자신의 가장 지독한 적이었고, 나는 그런 아빠의 딸이야. 하지만 이제 나는 곧 죽을 테고, 너한테 말하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건 때가 너무 늦었어. 더구나 지금은 내가 죽어가고 있으니까 내 편지 따위는 너한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고 자문하지만, 적어도 전보다 더 외로워진 기분은 느끼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에 네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 마치 내가 네 어깨워 손을 볼 수 있고, 네가 편지를 읽을 때 하는 모든 동작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거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해. 너를 부르러 사람을 보낼 수는 없어. 내게는 그럴 권리가 없으니까. 엄마는 이틀 전에 사람을 보내서 너를 부르고 싶어 했지만, 나는 차라리 편지를 쓰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네가 나를 과거의 나, 병에 걸리기 전의 나로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너를 기억해... 내 눈과 눈썹,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아. 그것도 네가 오기를 내가 바라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야. 그리고 관 속에 누워 있는 나를 보러 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어. 나는 안색만 조금 창백할 뿐 살아 있을 때와 거의 똑같아 보일테고, 노란 드레스를 입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네가 와서 나를 보면 후회할지 몰라.

  나는 이 편지를 온종일 이따금씩 쓰고 있어. 그런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의 천 분의 일도 아직 말하지 못했어. 죽어야 한다는 건 너무 끔찍해. 나는 솔직히 죽고 싶지 않아. 아직도 나는 속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어. 봄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조금만 더 좋아지게 해달라고. 봄이 오면 낮에는 밝아지고 나무에는 잎이 나겠지. 내가 다시 좋아지면 다시는 너한테 불쾌하게 굴지 않을게. 나는 얼마나 거기에 대해 생각했는지 몰라! 오오, 하느님. 나는 밖에 나가서 모든 자갈을 만지고, 계단을 지나갈때는 한 걸음마다 멈춰 서서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게 굴 거야. 내가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거야. 내가 살 수만 있다면, 누가 나를 공격하거나 때려도 나는 그 사람에게 미소를 지을테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거야. 나는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어. 누군가를 돕기 위해 뭔가를 해본 적도 없어. 그런데 이 헛된 삶이 끝나려 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죽고 싶지 않은지를 안다면, 아마 너는 어떻게든 해줄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주겠지. 물론 네가 많은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너와 그 밖의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를 놓아주기를 거부한다면, 하느님도 나한테 생명을 주실 거라고 생각했어. 아아, 그러면 나는 얼마나 고마워할까. 내가 삶을 허락받기만 한다면 다시는 누구한테도 못되게 굴지 않고, 내 운명이 무엇이든 거기에 미소를 지을 거야.

  엄마가 곁에 앉아서 울고 계셔. 엄마는 한밤중에도 줄곧 여기 앉아서 나를 위해 기도하셔. 이것이 조금은 나한테 도움이 돼. 작별의 쓰라림을 누그러뜨려주니까. 오늘 나는 생각했어. 어느 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너에게 다가가, 더 이상 너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않고 미리 사놓은 장미 한 송이를 건네면 너는 어떻게 할까?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더 이상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없다는 걸 기억해냈어. 죽을 때까지 다시는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는 가만히 누워서 슬픔에 잠겨 끊임없이 울고 있어. 소리 내어 울지만 않으면 가슴은 아프지 않아. 요하네서, 내 사랑하는 친구.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한 유일한 사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나에게 와서 여기 잠시만 있어줘. 그러면 나는 울지 않고 네가 와준 것이 기뻐서 최선을 다해 미소를 지을 거야.

  아니, 내 자존심과 용기는 어디로 갔지? 나는 이제 아버지의 딸이 아니야. 내 용기가 나를 떠났기 때문이지. 나는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어. 이 마지막 날들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괴로워했어. 네가 외국에 있을 때도 괴로웠고, 내가 봄에 시내에 온 뒤로는 날마다 괴로워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밤이 얼마나 끝없이 길 수 있는지, 전에는 몰랐어. 나는 길거리에서 너를 두 번 보았지. 한 번은 네가 내 옆을 지나가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너는 나를 보지 못했어. 나는 세이어 댁에서 너를 만나기를 바랐지만, 너는 오지 않았지. 거기서 만났더라도 너한테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는 않았겠지만, 그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했을 거야. 하지만 너는 오지 않았어. 그때 나는 네가 오지 않은 게 아마 나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어. 열한 시에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더 이상 기다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거든. 그래, 요하네스, 나는 얼 사랑했어. 내 평생 오직 너만을 사랑했어.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빅토리아야. 하느님이 내 어깨 너머로 이 편지를 읽고 계셔.

  이젠 너한테 작별 인사를 해야 해. 어두워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잘 있어, 요하네서. 날마다 고마워. 지구에서 날아갈때도 나는 끝가지 너한테 감사하고, 가는 동안에도 줄곧 네 이름을 속으로 부를 거야. 평생 행복하게 살고, 너한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줘. 네 앞에 몸을 던져 용서를 빌지 않은 것도 용서해줘. 나는 지금 진심을 다하여 너한테 용서를 빌고 있어. 행복해야 해, 요하네스. 그리고 영원히 안녕. 모든 날들과 모든 시간에 대해 다시 한 번 너한테 감사할게. 이젠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어.

너의 빅토리아가

 

  이제는 등불을 켜서 훨씬 밝아졌어. 나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다시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 있었어. 다행이 이번에는 그렇게 불쾌하지 않았어. 음악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곳은 어둡지 않았어. 나는 너무 감사하고 있어. 하지만 이제는 글을 쓸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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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자오선

한 번 만난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야생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둘은 걸어갔지. 어느덧 갈림길에 이르자 젊은이는 마구업자에게 이렇게 멀리까지 배웅해 주어 고맙다고 말하고는 헤어져 걸어갔네. 하지만 마구업자는 친구와의 작별을 견딜 수 없었는지 소리쳐 불러서는 다시 함께 걸어갔네. 길이 점점 어두운 숲 속으로 이어지자 마구업자가 젊은이를 죽였어. 돌로 쳐 죽이고는 옷과 시계와 돈을 빼앗은 뒤 길가에 땅을 파 시신을 묻었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지. 돌아가는 길에 자기 옷을 갈기갈기 찢고 부싯돌로 상처를 내서는, 아내에게 길에서 강도를 만나 젊은 여행자는 죽고 자기만  간신히 달아났다고 말했지. 부인은 대성통곡하더니 남편에게 그곳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는, 사방에 지천으로 핀 야생 앵초꽃을 꺾어 돌무덤에 얹었어. 부인은 늙을 때까지 몇 번이고 그곳에 갔지. 마구업자는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살았지만, 다시는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았네. 그는 죽어 가며 아들에게 자신이 한 짓을 고백했지. 그러자 아들은 자기가 그런 자격이 있다면 기꺼이 아버지를 용서하겠노라고 말했고, 마구업자는 아들에게 자격이 있다고 단언하고는 죽었지. 하지만 아들은 사실 전혀 유감스럽지 않았어. 그 죽은 젊은이를 내심 질투했던 거야. 아들은 무덤에 가 돌을 헤집어 놓고 뼈를 파내 숲에다 마구 내동댕이친 다음 고향을 떠났어. 서쪽으로 가 스스로 살인마가 됐지. 늙은 여인은 그때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는 야생 짐승이 무덤을 팠나 보다고 여겼지.  뼈를 다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무덤을 복원할 수는 있었지. 여인은 돌을 쌓고 또 쌓으며, 예전처럼 꽃을 바쳤어. 여인이 아주 늙어 할머니가 되자 사람들에게 그곳이 자기 아들의 무덤이라고 말하고 다녔지. 아마도 그 무렵에는 아들도 이미 죽고 없었을 거야.


서로의 목숨을 걸고 카드 게임을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지. 이 이야기를 다들 들어 보았겠지? 카드 한 장에 우주 전체가 걸려 있는 셈이야. 내가 저자의 손에 죽을지, 아니면 저자가 내 손에 죽을지 지금 이 순간 결판나지. 한 인간의 가치를 이보다 더 확실히 유효화할 수 있는 것이 달리 뭐가 있겠나? 궁극적 상태로의 게임의 확장은 운명이라는 개념에 관해 이론의 여지를 깡그리 없애지. 다른 인간에 대한 한 인간의 선택은 절대적이고 취소 불가능한 선호이며, 신의 섭리나 의미를 헤아리지도 않고 그런 심오한 결정을 평가하려 드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라네. 패자의 절멸이라는 판돈이 걸린 게임에서 의사 결정은 매우 명확하지. 손에 특정 패를 쥐고 있는 자는, 따라서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네.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속성이야. 일단 게임에 판돈이 걸리면 권위와 정당화는 저절로 생겨나네. 보라고, 전쟁은 가장 진실한 형태의 예언이야. 더 큰 의지 안에서 한쪽의 의지와 다른 쪽의 의지를 실험하지. 사실상 그 둘을 함께 묶어 서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바로 더 큰 의지라네. 전쟁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단일화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게임이지. 전쟁은 바로 신이야.


소년은 총칼과 밧줄로 죽음을 맞는 이들을 보았고, 자신을 2달러에 판 여인이 그 2달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보았다. 중국 땅에서 온 배가 작은 항구에 사슬로 묶여 있고, 고양이처럼 말하는 자그마한 누런빛의 사람들이 칼로 화물을 열어젖혀 차와 비단과 향신료를 들어내는 것을 보았다. 꿍어랟는 시커먼 바다를 가파른 바위가 어르는 고독한 해변에서 드넓은 날개를 쫙 펴고 날아오르며 다른 새들을 난쟁이처럼 보이게 하는 독수리가 제비갈매기나 물떼새처럼 새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았다. 모자 하나에 다 담을 수도 없을 황금 더미가 카드 한 장에 모조리 날아가는 것을 보았고, 우리에 갇힌 곰과 사자가 야생 수소와 싸워 목숨을 잃는 것도 보았고, 샌프란시스코가 잿더미가 되어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는 것을 두차례나 지켜보았다. 말을 타고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던 소년은 하늘을 등지고 밤새 타오르는 도시와, 돌고래가 불꽃 사이로 솟아오르는 시커먼 바닷물에 드리워진 불구덩이를 보며 불길에 와락와락 뜯기는 목재의 추락과, 길 잃은 자들의 비명을 들었다. 


사건이든 의식이든 모두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일어나는 거라네. 서곡에는 어떤 결정적 사건이 포함되지. 저 커다란 곰의 죽음 같은 것 말이네. 심지어 각 사건의 정당성을 의문시하는 이들에게 조차도 오늘밤이 유별나거나 특이하게 보이지는 않을 거네. 그렇게 흘러가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지. 의식도 마찬가지야. 일부에서는 의식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고, 규모가 크고 작은 사건만이 있을 뿐이라고들 하지. 그 말이 맞다면 종교 의식 역시 특정 규모의 사건에 불과해. 종교 의식에는 반드시 피가 포함되어야 해.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된 종교 의식이라고 할 수 없지. 여기 있는 누구나 가짜 의식을 단번에 알아보지. 그렇고말고, 어린애애게 고독감을 일깨우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젖가슴이 주던 감촉이야. 모두가 사라지고 사냥감만이 그 고독한 참가자와 남게될 때도 마찬가지지. 그 고독한 사냥감은 결코 적이 아니야.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곳에서나 그렇지. 시선을 피하지 말게. 우리는 지금 외계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네. 남자라면 누구나 그 감정을 잘 알고 있지. 공허와 절망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던가? 피는 바로 그 감정이 바짝 굳지 않도록 해 주는 완화제이지 않은가? 판사가 바싹 기대었다.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누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인가? 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가? 아니면 인간이 감히 논할 수 없는 주제인가? 죽음이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이고자 하는 걸까? 나를 보게.


운명은 끝내 피할 수 없어. 판사가 말했다.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지. 자기 운명을 알고서 일부러 반대의 길을 택한 자들도 결국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운명을 맞게 되네. 운명이란 이곳 세계만큼이나 거대하여 반항자까지도 다 품고 있거든. 너무나 많은 이들이 파멸하고 만 이곳 사막은 너무도 광대하여 우리 마음을 마구 끌어당기지만 사실상 텅 비어 있지. 황량한 불모지일 뿐이야. 사실상 거대한 돌덩어리지. 

판사가 술잔에 술을 따랐다. 마시게. 세상은 계속된다네. 우리는 밤마다 춤을 추고, 이 밤도 예외가 아니네. 굽은 길이든 곧은 길이든 다 똑같아. 우리 둘이 헤어진 후 얼마 만에 다시 만난 건가? 인간의 기억이란 불확실하고, 존재했던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와 거의 다를 바 없지. 그는 판사가 술을 따라 준 잔을 집어 들이켜고는 다시 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판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온갖 곳을 돌아다녔고, 여기도 그저 그중 하나일 뿐이오. 

판사가 눈썹을 활처럼 휘였다. 자네, 목격자라도 배치해 두었나? 자네가 그곳을 떠난 후에도 그곳이 계속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누가 알려 주던가? 

헛소리 작작 해요. 

그래? 어제는 어디 있나? 글랜턴과 브라운은 어디 있고, 신부는 어디 있나? 판사가 바싹 기대었다. 사막에서 자네가 엘리아스의 손에 내버려 둔 셸비는 어디 있나? 산에서 자네가 버리고 도망간 테이트는? 자네가 지켜 주기로 약속한 공화국의 적들을 무찔러 피칠갑을 하고서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을 때 주지사의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추었던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어디 있나? 바이올린 연주자와 무용수는? 

그야 당신이 잘 알겠죠. 

이것 하나는 알지. 전쟁이 불명예가 되고 전쟁의 고귀함이 의문시된다면 피의 신성함을 아는 명예로운 이들은 무도회에서서 쫓겨날거네. 춤이야말로 전사의 권리이기에 결국 무도회는 가짜 무도회가 되고, 춤을 추는 이도 가짜가 되는 거지. 하지만 언제나 진정한 춤을 추는 이가 한 명 정도는 있다네. 누군지 아나?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 말은 자네가 아는 것보다 더욱 진실하다네. 하지만 이 말을 해주고 싶군.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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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


그때 난 동거중인 여자가 있긴 했지만 그 여자도 집에 없을 때가 많아 나도 외로운 편이었다. 내 옆에 서 있는 큰 엉덩이 때문이라도 외로웠다.


조이스는 마침내 달팽이를 삼켰다. 그러더니 접시에 담긴 다른 것들도 찬찬히 살폈다.

'모두 작은 똥구멍이 달렸어! 끔찍해! 끔찍하다고!'

'똥구멍이 뭐가 끔찍해?'

조이스는 냅킨을 입에 갖다 댔다. 그녀는 일어나더니 화장실로 달려갔다. 조이스는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에서 화장실에 대고 소리쳤다.


'똥구멍이 뭐가 나쁘냐고! 당신한테도 똥구멍은 있잖아. 나도 똥구멍이 있다고! 가게에 가서 큼지막한 쇠고기 스테이크를 하나 사봐. 거기도 똥구멍은 달렸어! 지구상에는 똥구멍이 널렸단 말이야! 어떤 면에서는 나무들도 똥구멍이 달렸는데 못 찾는 것뿐이야. 나무들도 이파리를 싸잖아. 당신 똥구멍, 내 똥구멍, 세상에는 수십억 개의 똥구멍으로 가득 찼어. 대통령도 똥구멍이 있고, 세차장 직원들도  똥구멍이 있어. 판사들도 살인자들도 똥구멍이 있다고. 심지어 자주색 넥타이핀 남자도 똥구멍은 있어!'

'아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그녀는 다시 구역질을 했다. 시골 촌년. 나는 사케를 따서 한 잔 마셨다.


나는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그건 인정해야지.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나왔다.

'이거 맞히기 쉽네. 하지만 당신은 그자하고도 원만하지 못할 거야. 행운을 빌어. 당신의 이런저런 점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 알고 있을거야. 단지 돈 때문이 아니고.'

조이스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엎드린 채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저 촌년, 응석받이로 자라서 불안정한 애일 뿐이었다. 저기서 아무런 가식 없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울고 있었다.

베티는 아이가 둘 있었지만, 둘 다 베티를 찾아오는 법이 없었고 편지를 보낸 적도 없었다. 베티는 이제 싸구려 호텔의 청소부였다. 처음 베티를 만났을 때 그녀는 비싼 옷을 입고 있었고 날씬한 발목에 비싼 구두를 신고 있었다. 몸매가 탄탄했고 아름답다고 할 만했다. 눈은 야성적이었다. 잘 웃었다. 부자 남편을 만났다가 이혼했는데, 그는 음주 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로 죽어서 코네티컷에서 화장되었다. <저 여자를 길들일 순 없을 거야.>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저 꼴이었다.

신부는 맨날 하는 소리를 읊었다. 나는 듣지 않았다. 관이 있었다. 과거에 베티였던 존재가 그 안에 있었다. 아주 더웠다. 해가 지면서 노란 침대보처럼 빛이 깔렸다. 파리 한 마리가 빙빙 돌았다. 반쪽짜리 장례식이 반쯤 지났을 때 작업복을 입은 두 남자가 내 화환을 들고 왔다. 장미는 시들어 있었다. 더위 속에서 시들어, 시들었고, 시들고 있었다. 그들은 그 물건을 가까운 나무에 기대 놓았다. 장례 미사가 거의 끝나갈 때 호환이 앞으로 기울더니 철퍼덕 엎어졌다. 아무도 세우지 않았다. 그때 미사가 끝났다. 나는 신부에게로 가서 악수를 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미소짓는 사람이 둘이 되었다. 신부와 마샤. 오는 길에 래리가 다시 말했다. '묘석은 어떻게 할지 편지를 쓸게요.' 나는 아직도 그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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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5 . 30 월요일

 

나의 어린 벗이여,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너를 여러 방향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도 있다.

소위 유혹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으며, 너는 사회의 잔인성에 의해 갈가리 찢겨질 수도 있다.

물론 너는 그것을 혼자 견뎌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력이나 결정 또는 욕망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네가 네 주변과 자신 안의 잘못된 것들을, 잘못된 감정이나 희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거기에서부터 자각이 지성이 시작된다.

너는 너 자신에게 등불이 되어야만 하며, 그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단지 이러한 모든 것들을 너에게 지적해주었을 뿐이다.

그것은 사실들이 너를 두렵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바로 보아야 할 사실들이 있을 뿐이다.

만약 네가 그것들을 제대로 본다면, 그것들은 결코 너를 두렵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들은 공포스럽지 않다.

그러나 만약 네가 그것을 피해서 달아나기를 원한다면, 등을 보이고 달아난다면,

그것들은 너를 두렵게 할 것이다.

네가 지금까지 행해온 것들이 완전히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견뎌라.

사실과 함께 살아가며 그것들을 너의 취향이나 반응의 형식에 따라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살아라.

복잡하거나 모순되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말고, 오직 내적으로 단순해져라.

너는 오늘 아침 테니스를 쳤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는데 상당히 잘 치는 것 같더구나.

 아마도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네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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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5. 12 목요일

 

우리는 진지하게 묻는다.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슬픔과 그의 완전한 고독 그리고 혼란, 근심 등을 끝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외적인 대행자, 신을 포함한 외적인 대행자가 존재하는가?

인간은 언제나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을 견디며, 그것들에 익숙해지며

또 그것들이 우리 삶의 일부라고 말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세계 도처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것을 참고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외적인 어떤 것에 도움을 청하기 위한 조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조직은 평화를 기구하고, 평화를 위한 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그 안의 인간의 마음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인간을 변화시킬 것인가?

 인간은 끝없이 고통을 당해왔으며, 공포에 사로잡혀왔으며 또 쾌락을 추구했다.

이것이 인간의 삶의 과정이었으며, 아무것도 그것을 변화시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렇다거나 인생은 그렇다는 식으로

 

삶의 모든 것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비탄에 빠지거나 화를 내는 대신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변화될 수 있는가?

분명히 외적인 대행자에 의해서는 변화될 수 없다.

인간은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서 어떤 도움도 요청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을 검토해야 한다.

인간이야말로 인간 자신의 스승이다. 인간은 이 사회를 만들어왔고 또 그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바로 그 책임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스스로 안에 변화를 일으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사유는 너무나도 무관심하고 무책임하며,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삶의 충족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이상화시키지만 여전히 이기적인 채로 남아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은 염세주의자가 되는 것도 또 낙천주의자가 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당신 자신과 당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당신은 결코 그 사실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사실로부터 도피한다면 당신은 결코 이 지상에서 평화를 가질 수 없을 것이며

결코 지속적인 기쁨이나 축복의 감정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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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7


산을 내려가다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바위 한 가운데엔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계곡물 위로 새들이 날아다녔다.

바위에 눕자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멀리선 새 몇마리가 물을 마시며 지저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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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3. 10 목요일


멀리서 올빼미 우는 소리가 들리고 그 반대쪽 계곡에선 낮고 깊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은 새벽이다.

하루의 소음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고요하다.

해가 떠오르는 곳은 어딘지 신비롭고 성스럽다.

거기에는 여명에 대한, 신비롭고 고요한 빛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 있다.

그 이른 아침 햇살은 부드러웠고 미풍조차 불어오지 않았다.

모든 식물들, 나무와 풀들은 고요하고 또 평온하게 앉아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명은 신비한 고요로 천천히 대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밝아오기 시작했고, 해는 산봉우리를 정결한 금빛으로 물들였다.

산꼭대기의 눈은 햇살과 함께 순결하고 깨끗히 빛났다.


당신이 산 아래로 난 오솔길을 따라 

작은 마을을 떠나 산으로 올라가자, 대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뚜라미와 메추라기, 그리고 온갖 다른 새들은 새로운 날의 숭배로 넘치는 아침노래와 찬송을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면 당신은 생각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빛의 일부가 된다.

당신은 스스로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영혼은 그것의 투쟁과 고통들을 깨끗이 비워내었다.

당신이 산길을 따라 걸어올라갈 때면 혼자 있다는 느낌마저 사라졌다.

아침 안개는 게곡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고,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질수록 당신은 삶의 환상과, 낭만과, 순진무구함으로 빠져들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 당신은 산을 내려왔다.

바람과 풀벌레들의 속삭임, 새들의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당신이 산을 내려오자 안개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새벽의 영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거리와 상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당신은 틀에 박힌 일상의 삶을 시작한다.

당신은 반복되는 업무에 사로잡힌 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 속에서, 자연과의 동일화를 잃어버린 채, 

이데올로기의 분열 속에서 전쟁을 준비하며, 

당신 안의 고통과 인간의 영원한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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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 난간을 기대고 있는 것과 난간위 지붕에 있는것은 석기시대와 철기시대만큼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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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했고 배부르고 따뜻하다
하늘엔 별들이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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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도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살라마노의 개나 그의 마누라나 그 가치를 따지면 매한가지다. 자동인형 같은 그 작은 여자도, 마송과 결혼한 그 파리 여자도 마찬가지로, 또 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던 마리나 마찬가지로 죄인인 것이다. 셀레스트는 레이몽보다 낫지만, 셀레스트와도 마찬가지로 레이몽도 나의 친구라고 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마리가 오늘 어떤 새로운 뫼르소에게 입술을 내준다해서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이해하느냐고, 이 사형수를, 그리고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이런 모든 것을 외쳐대며, 나는 숨이 막혔다. 그러나 벌써 사람들이 사제를 내 손아귀에서 떼어내고 간수들이 나를 위협했다. 그러나 사제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잠시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괴어 있었다. 그는 마침내 돌아서서 사라졌다.

 그가 나가버린 뒤에, 나의 마음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 위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기 때문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왔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인생이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가졌는지, 왜 생애를 다시 시작해보는 모험을 했는지 나는 이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잠시 머무는 휴식시간 같았었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내게서 악을 몰아내고 희망을 비워 주기라도 한 듯이, 징조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마주해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마침내 그토록 형제같이 느껴지자, 나는 행복했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서,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기 위해서, 내게 남은 바람은,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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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10월 4일


 전 세계의 제도와 조직은 인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 다양한 물질적 조직을 만들었다. 전쟁과 민주주의, 독재정치 그리고 종교적 제도, 모두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지속되어 왔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우러러 보며 외면적 또는 내면적으로 도움을 받고 싶어한다. 욱신대는 내면의 상처와 시간의 그림자, 아득한 생각까지 모두 말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종류의 제도가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내면을 바꾸지 못했다. 제도는 절대 인간을 근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럼에도 왜 인간이 이런 제도를 만들어내 도움 받고 싶어 하며 오랫동안 지속되는 안정감을 추구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이상할 만큼 궁금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대립하는 더 많은 제도와 조직을 만들어내고 있다.


왜 우리는 예민함이라는 몹시 연약한 감각을 점점 잃어가는 것일까? 문제와 혼란뿐 아니라 우리에 관한 모든 예민함 말이다.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예민함이 아닌 그저 세심해지는 것. 예민해진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고작 며칠 전에 태어났지만 폭풍우와 비, 어둠, 그리고 빛에 맞서야 하는 어린 나뭇잎처럼 연약해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연약해졌을 때 상처받는다. 상처를 안고 스스로 뒤로 물러나 주위에 벽을 짓고 단단하고 또 잔인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추악하고 잔인한 반응 없이 모든 움직임과 세상에 연약해질 때, 후회와 상처, 스스로를 강요하는 훈육 없이 세심해질 때, 비로소 측정 불가능한 존재의 자질을 가질 수 있다.우리는 이런 연약함을 소음과 잔인함, 천박함 그리고 하루하루의 혼잡함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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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 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 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허리를 굽혀서 나는 그저 금붕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참 잘들도 생겼다. 작은놈은 작은놈대로 큰놈은 큰놈대로 다 싱싱하니 보기 좋았다. 내려 비치는 오월 햇살에 금붕어들은 그릇 바탕에 그림자를 내려뜨렸다. 지느러미는 하늘하늘 손수건을 흔드는 흉내를 낸다. 나는 이 지느러미 수효를 헤어 보기도 하면서 굽힌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았다. 등이 따뜻하다.

나는 또 오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우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그 오탁의 거리 속으로 섞여 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나서서 나는 또 문득 생각하여 보았다. 이 발길이 지금 어디로 향하여 가는 것인가를…… 그때 내 눈앞에는 아내의 모가지가 벼락처럼 내려 떨어졌다. 아스피린과 아달린.

우리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느니라. 설마 아내가 아스피린 대신에 아달린의 정량을 나에게 먹여 왔을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는 없다. 아내가 대체 그럴 까닭이 없을 것이니, 그러면 나는 날밤을 새면서 도둑질을 계집질을 하였나? 정말이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 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발길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좀 어려웠다. 가야하 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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