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자유'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3.04.10 교육에 관하여
  2. 2013.04.10 슬픔에 관하여
  3. 2013.04.10 사랑에 관하여
  4. 2013.04.10 이상에 관하여
  5. 2013.03.31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1

교육에 관하여


세게를 여기저기 여행해 보면 인간 본성이 얼마나 똑같은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대학에서 그렇습니다. 

대학에서는 마치 모형처럼 주요 관심사가 안전을 찾거나, 중요한 인물이 되거나 

또는 가능한 한 생각은 적게 하면서 좋은 시간을 갖는 인간형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재래식 교육은 독립적 사고를 극히 어렵게 만듭니다. 

획일적 사고는 평범한 인간을 낳을 뿐입니다. 

집단과 다르게 되거나 환경에 저항하는 것은 성공을 숭배하는 한 쉽지 않고 때로는 모험적입니다. 

물질적인 영역이건 영적인 영역이건 보상의 추구일 뿐인 성공하려는 충동, 

내적이나 외적 안전을 위한 탐색, 

안락에 대한 욕망, 

이 모든 과정은 창조적인 불만을 누르고, 순발성을 종결시키며,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삶의 지성적인 이해를 막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과 가슴이 둔해지기 시작합니다. 

안락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갈등이 가장 적은 삶의 조용한 구석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그 운둔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삶의 두려움, 이러한 투쟁과 새로운 체험의 두려움이 우리 속에서 모험정신을 죽입니다. 

전반적인 양육방식과 교육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회의 기존 양식에 반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권위와 전통을 존경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삶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살고 투쟁하고 있습니까? 

이름을 얻고, 더 좋은 일자리를 얻거나, 더 효율적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더 큰 지배력을 갖기 위하여 교육되고 있다면 

삶은 천박하고 공허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과학자가 되기 위하여, 책과 결혼한 학자가 되기 위하여 또는 지식에 중독된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 교육받고 있다면, 

세계의 파괴와 비참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삶에 더 높고 더 넓은 의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결코 발견하지 못하면 교육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고등교육을 받는다 해도 사고와 감정의 깊은 통합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며 많은 두려움으로 찢겨질 것이고, 

교육이 삶의 통합된 전망을 배양하지 못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축소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성을 갖지 않고 

교육은 이차적인 가치를 강조하여 어떤 분야의 지식에 숙달되도록 만들 뿐입니다. 

비록 지식과 효율성이 필요할지라도 그것을 주로 강조하는 것은 충돌과 혼란으로 이끕니다. 

야심이 동기가 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능률은 사랑에 의하여 고취된 능률입니다. 

사랑은 삶에 대한 통합된 이해를 가져다주는 것으로서, 그것이 없이는 무자비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이 세계 모든 곳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의 현재 교육은 산업화와 전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주요 목적은 능률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자비한 경쟁과 이 상호 파괴의 기계속에 붙잡혀 있습니다. 

만약 교육이 전쟁으로 이끈다면, 

교육이 세상을 파괴하거나 파괴되도록 우리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실패한 것이 아닙니까?




교육의 기능은 통합되고, 따라서 지혜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학위를 취득하면 지혜롭지는 않지만 기계적으로 능률적이 될지도 모릅니다. 

지혜는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책에도 나오지 않고 영리한 자기방어적인 반응이나 공격적인 주장들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학식 있는 사람보다 더 총명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시험과 학위를 지혜의 평가 기준으로 삼아왔으며 

극히 중요한 인간 문제들을 회피하는 교활한 마음을 계발시켜 왔습니다. 

지혜는 본질적인 것,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지각하는 능력이며, 

그 결과 우리가 단순히 공식에 얽매이거나 슬로건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육은 우리가 국가 및 사회적 장벽들을 강조하는 대신 그것을 허물어뜨리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대감을 낳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교육체제는 우리를 예속적, 기계적이며 무분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육이 지적으로는 우리를 일깨우지만, 

내면적으로는 우리를 불완전하고, 무능력하며, 비창조적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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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관하여


슬픔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단순히 슬픔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념, 판단을 형성해 오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도망, 평가, 두려움이 그것을 몸소 체험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치통을 앓고 있을 때는 그것에 대한 관념들이나 견해들을 형성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끼면서 행동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곧바로 아니면 먼 뒤에라도 하는 행동이 없습니다. 정말로 고통을 당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라보아야지 도망쳐서는 안됩니다.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까? 

만약 단지 도피하기를 바란다면 알약, 신앙, 설명, 오락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거기에는 불가피하게 의존성, 두려움 등등의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만약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도망가기를 중지하고 판단하지 말고, 선택하지 말고, 그에 대해 깨쳐야 합니다.

슬픔을 관찰하고 그에 대하여 배우고, 슬픔이 갖는 모든 본질적인 복잡한 뒤얽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슬픔에 놀라 겁에 질리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자기연민의 독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슬픔의 이해와 더불어 슬픔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한시간밖에 살 수 없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당신은 외적으로 필요한 것, 당신의 일, 당신의 유언 등등을 정리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가족과 친구들을 함께 불러내서 당신이 그들에게 끼쳤을지도 모를 피해에 대해서 그들의 용서를 요청하거나

그들이 당신에게 했을지도 모를 어떤 피해에 대해서라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담은 일들에게, 욕망들에게, 세상에게 완전히 작별을 고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한 시간 동안 가능하다면, 그것은 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날들이나 몇 해 동안에도 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들이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해보십시오, 그러면 알아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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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당신은 아내가 없으면 외로울 것이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 길을 잃은 셈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내는 당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행복을 위해 아내에게 의존하고 있고, 이 의존상태를 사랑이라 부릅니다. 

당신은 홀로 있기를 두려워합니다. 아내는 당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항상 그대 곁에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아내의 외로움을 은폐합니다. 

그러나 홀로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외로움을 은폐하기 위해 서로를 이용합니다.

우리는 갖가지 방식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관계 속에서 외로움으로부터 도망갑니다. 

이런 관계는 다 의존이 됩니다. 

내가 라디오를 듣는 것은 음악이 나를 즐겁게 해주고,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떼어 놓기 때문입니다. 

책과 지식도 또한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주 편리한 도구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 우리는 의존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가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신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당신은 의존적이 되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대한 두려움에 비례해서 의존은 더욱 강해지며, 도피는 더욱 더 불가결해집니다. 

아내, 책, 라디오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됩니다. 

드디어 도피는 아주 중요한것,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당신은 아내를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방편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아내에게 부착되어 있습니다.

 아내를 소유해야지 잃어버려선 안 됩니다. 그리고 아내가 소유되기를 원합니다. 

아내 역시 당신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피라는 공동의 필요가 있기 때문에 서로를 이용합니다. 

이런 상호이용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실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



사랑은 동일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사고도 아닙니다. 

사랑이 거기에 있을 때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을 때,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대상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만 당신은 사랑을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교류가 있을 때, 사고나, 표상이나, 기억의 재생은 없습니다. 

어떤 차원에서건 영적 교류가 끊어질 때, 사고와 상상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사랑은 마음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질투, 집착, 소유, 결핍, 과거의 회상, 내일에 대한 동경, 슬픔과 걱정 등의 연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 연기는 실제로 불꽃을 꺼버립니다. 

연기가 없을 때만 불꽃이 있습니다. 둘이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둘이 공존한다고 하는 생각은 소원에 불과합니다. 

소원은 사고의 투사이고, 사고는 사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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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관하여


반명제는 명제의 연장입니다. 반대되는 것은 그 자체의 반대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폭력적인 마음이 그 반대인 비폭력의 이상을 투사합니다. 

그 이상이 그 반대되는 것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상이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 또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으로부터의 회피나 도피가 아닐까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은 분명히 현실에 대한 이해를 늦추는 수단이 되며, 

이 갈등은 당장의 문제를 은폐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문제를 가져다줄 뿐입니다. 

이상은 현실로부터의 놀랍고도 훌륭한 도피가 됩니다. 

집단적인 유토피아처럼 비폭력의 이상동 허구적입니다. 

이뤄져야 하는 것, 이상은 우리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은폐하고 회피하도록 도와줍니다.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보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보상은 정말로 어리석고 야만스러운 것이라 멀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상을 좇는 것은 다른 수준에서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그 또한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상이란 보상이며 마음이 떠올린 가공적인 상태입니다. 

폭력적이고, 유리되고, 자체만을 위해 나서는 마음이란 것이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보상, 

른바 이상, 유토피아, 미래라고 부르는 허구를 투사하고, 그것을 헛되이 추구합니다.


"만일 이상이 허구적이라면, 그것은 저의 모든 생각을 변혁시킬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이상을 추구하는 일이 전혀 무익한 일이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헛된 몸부림이며,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자기기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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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이제 여러분은 이 모든 복잡한 구조를 의식하고, 두려움의 근원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기존의 이상과 가치와 개인적으로 갈등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거짓된 것들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때, 전체를 위한 올바른 환경이 창조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첫 번째 관심은 감옥을 의식하는 것 입니다. 

다음은 자신의 사고가 계속적으로 감옥의 가치와 충돌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도피는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망상뿐인 이상을 만들어냅니다. 

도피는 마음이 부리는 속임수입니다. 만약 마음이 도피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감옥이라는 환경과 직접적으로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감옥의 가치, 불멸,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묻기 시작할때 

불가피하게 일어날 고통을 직면하기보다는 오히려 망상 속으로 도피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속박되어 있는 전통 그리고 사회 및 종교의 가치들과 부딪히는 것이지, 

이상을 통해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가치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인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참된 지성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가족들과 친구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그릇된 변명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무언가 중대한 것을 하고 싶을 때 가족과 친구들을 개의치 않고 그것을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때 그들을 해칠 거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통제를 벗어납니다. 

자기가 아주 강렬히 느끼고, 아주 완벽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가족, 단체, 계층적 속박의 한계를 넘어서 자기를 끌고 갑니다. 

하지만 당신이 여전히 특수한 안전에 매달려 있을 때, 

내적인 풍요가 없고 그 내적 풍요를 위한 외부적 자극에만 의존할 때, 

당신은 가족, 친구, 이상, 믿음, 전통, 질서를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만약 충돌에 의해 초래된 고통에 대한 충분한 의식이 있으면 

당신은 어떤 특수한 전통, 친구 혹은 가족의 속박 속에 붙잡혀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고 싶어 합니다. 그 충돌을 일으키는 환경의 의미를 찾아내고 싶어 합니다. 

그런 다음 그속에는 개성도 없고, '나'의 한정된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멀리 헤맬 것이고 얼마나 멀리 헤매지 않을 것인가를 고려해야 하는 경우는 

오직 자신이 '나'의 한정된 생각에 매달려 있을 때 입니다.



누가 환경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신비스런 신입니까? 

잠깐만요. 누가 환경, 사회적 구조, 경제적, 종교적 구조를 만들었습니까? 

우리입니다. 

각자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기여해 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집합체가 되었습니다. 

그 집합적 현재를 만드는 것을 도운 개인은 집합체 속에서 상실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집합체가 그의 틀, 그의 환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전성에 대한 욕구를 통해서 당신은 국적, 계급 차별, 착취가 있는 자본주의적인 환경을 창조했습니다. 

우리가, 당신과 내가 그것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기적적으로 생겨나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안전을 추구하고 있는 한, 다른 뉘앙스와 다른 색깔을 가진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적인, 탐욕적인 체계를 다시 만들 것입니다.

이것은 부조리한 의식, 착취, 두려움 등 문제를 안고 있는 종교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누가 종교들을 만들었습니까? 

여러분과 나지요. 

여러 세기에 걸쳐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만들었고 두려움을 통해 그것들에게 굴복했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하는 것' 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한, 

이 강박 속에서 여러분은 결코 사고와 감성의 그 신속한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이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자라왔고, 

그런 까닭에 생각과 느낌을 파괴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체계, 방법, 선생님들에 의해 억매이고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 같은 '해야 하는 것' 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버리십시오. 

이것은 방탕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나는 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하지 말아야 한다. " 고 말하고 있는 마음을 깨달아 아십시오. 

그런 다음에 아침에 꽃이 피어나듯이 지성이 생겨나고, 존재하고, 기능을 발휘하며, 이해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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