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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7.11.19 안녕, 용문객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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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7.07.23 거울
  9. 2017.07.23 죽음
  10. 2017.07.17 하시모토 시노부
  11. 2016.10.16 부코스키
  12. 2016.07.16 부코스키
  13. 2016.07.11 권정생
  14. 2015.11.12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15. 2015.05.24 적과 흑
  16. 2015.03.24 무소의 뿔
  17. 2015.01.05 빅토리아
  18. 2014.11.26 핏빛자오선
  19. 2014.11.15 부코스키
  20. 2014.11.12 1983 . 5 . 30 월요일
  21. 2014.11.12 1983 . 5. 12 목요일
  22. 2014.11.12 1983. 3. 10 목요일
  23. 2014.04.02 이방인
  24. 2014.03.03 1983 10월 4일
  25. 2014.03.01 날개
  26. 2014.02.22 1983 3월 18일 금요일
  27. 2014.01.22 사랑과 섹스에 관한 단상
  28. 2013.11.03 삶과 죽음에 대하여 1
  29. 2013.07.08 이런저런
  30. 2013.05.26 애니홀

피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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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


글 속 언어는 그 사람의 사는 곳과 사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난 평생을 백수에 일용직 노동자로 살았다.
박식한 대화는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내 삶은 상류층과 교류가 생기려야 생길수가 없다.
난 똥구덩이에 앉아 있다.
좀 화가 났고 그건 이상한 광기였는데 내가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이다.
난 마음을 홀로 다스리고 삼켜야 했다.
본능을 괴롭히고 편견을 키웠다.
고독은 가장 큰 무기다.
현실을 과장하려면 고독이 필요하다.
난 여가에 진정한 가치를 둔다.
그게 내가 찾은 방식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곧 성스러운 장소다.
한 도시에서 버려진 무덤을 찾았고
정오에 술에 취한 채 거기서 잠을 잤다.
다른 도시에서는 더럽고 냄새나는 운하를 쳐다보며
몇 시간이고 앉아 멍을 때렸다.
홀로 보낼 몇 시간, 며칠, 몇 주, 몇 년이 필요했다.
굶주리며 지낼 작은 방도 찾았다.
난 적은 돈으로 오래 버티는 재주가 있다.
모든 걸 시간을 위해 희생했고 주류에서 벗어났다.
하루에 초콜릿 바 하나가 식사의 전부일 때가 많았다.
가장 크게 돈을 쓰는 건 싸구려 와인을 살 때다.
담배를 직접 말아 피웠으며 단편을 수백 편 쓰고
대부분을 잉크로 직접 인쇄했다.
타자기를 저당 잡힌 적이 많았다.
인간을 관찰하려고 바에 앉아 술을 마셨다.
대략 183센티미터 키에 61킬로그램이 나갔고
술에 절었다.
난 태생이 마른 남자인데 머리는 컸다.
난 절망적이지 않다.
내 가난이 즐거웠다.
굶는 건 처음 2~3일만 힘들 뿐이었다.
그 후부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계단을 둥둥 떠서 내려오고 햇살은 매우 밝게 비치고 소리는 아주 크게 들린다.
통찰력이 흐려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진다.
휴일이나 전 세계 축제는 의미가 없어진다.
내 상태가 어떤지 확신할 수 없지만 아무튼 꽤 건강하다.
외로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된 문제는 치아다.
엄청난 치통의 공격을 받았다.
얼른 와인을 입에 밀어 넣고 방 안을 걸었다.
이가 헐거워져 손가락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가끔 손바닥으로 이가 빠져나오기도 했다.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도서관에서 문학 잡지를 읽고 최고의 글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보며 당혹감을 느꼈다.
번지르르한 말이 흐를 뿐 속은 텅 비었다.
도박도 빚도 즐거움도 없다.
과거의유명한 작품인 고전을 읽었다.
최소 수백년이 지났는데도 온갖 거짓말, 치장, 과장, 사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뭘 하는지 몰랐지만 그렇게 했다.

가고자 하는 곳에 더 치중하고
내게는 신과도 같은 단순함에 몰두했다.

여유가 없고 적게 가질수록 실수나 잘못을 범할 기회가 줄어든다.
천재는 단순한 방식으로 완전한 걸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계속 잘 읽히는 문장을 쓰려고 했다.

내 글이 받아들여진 적은 매우 드물었다.
편집자들은 대체로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특히나 손으로 인쇄한 긴 원고를 받으면 그렇게 느낀다.
한 편집자의 답신을 기억한다.
"대체 이건 뭐죠?"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난 내 방식대로 미쳤다.
커튼을 전부 내리고 일주일간 침대에서 꼼짝도 안 한 적이 많다.
한번은 이런 소리를 들었다.
"헬렌, 3호실에 사는 남자 알아? 그의 쓰레기통에는 와인병만 들어있어. 그리고 어두운 방에서 음악을 들어. 난 저 사람이 여길 나가게 만들거야."
여자, 자동차 뭐 그런 것들 그리고 TV는 내게 이상한 외부 요소일 뿐이다.
간간이 아주 간간이 여자들이 있었지만 괜찮은 여자는 거의 없었다.
"집에 TV가 없는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왜 그래 자기 헛소리 그만 하고 다리 좀 보여 줘봐"
좁아터진 방, 공원 벤치, 최악의 직업 최악의 여자들과 수십년을 산 뒤에 마침내 내 글의 일부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찾는 곳은 소규모 잡지나 포르노 잡지였다.
포르노 잡지가 좋은 방출구가 되었다. 원하는 걸 더 직접적으로 더 좋게 말할 수 있으니까.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드러낸 여자 사진 사이에서 마침내 단순함과 자유를 얻었다.
이윽고 난 더 정진해서 한층 존경할 만한 출판사를 공략했다.
책을 몇 권 출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문제, 내 방식을 고수했다고 생각한다.
문장 속 들쑥날쑥한 돌덩이, 비꼬는 웃음, 트림, 방귀를 좋아한다.
여전히 사람에게 공격적이지만 사람을 공격하는 글은 쓰지 않는다.
그건 너무 쉬우니까
장모는 나보다 겨우 열 살이 많은데 지난해 날 찾아왔다.
어느 날 저녁 경마장에서 돌아와 보니 장모가 내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엄마한테 줬어요 아내가 말했다.
뭣하려? 내가 물었다.
장모는 스크래블과 십자말풀이를 좋아하고 즐겨 보는 tV프로그램이 제시카의 추리극장 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우린 장모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난 아내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내 책에 대해 뭐라고 했어?"
아내는 좋은 연기자다. 씩씩거리는 모욕까지 목소리에 담을 수 있다.
"네 남편은 왜 저런 말을 써야 했니?"
대부분은 대화를 말한 것이겠지만 난 그사이 문장이 거슬렸다는 걸 확신했다.
뻣뻣하고 갈라지고 흐물거리고 새까만, 셰익스피어와는 거리거 머니까.
난 눅눅한 굴에 들어앉아 그런 글을 쓰려고 성실하게 노력했다.
장모가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나니 날 증명한 것 같았다.
장모의 인정을 받으려면 작품은 내게 두려운 것이어야 하고,
그건 내가 무뎌져서 실용주의자들의 방식으로 갔다는 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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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수하물 카트를 밀며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앉아 있는데 웨이터가 지나가다 뭔가에 미끄러졌다.

그가 넘어지면서 그가 들고 있던 커다란 쟁반이 엎어졌다.

접시가 박살났고, 음식물이 온 바닥에 미끄러지고 굴러가며 냄새를 피웠다.

그 많은 것들이 용케 나만 피해갔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웨이터는 일어나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음식 찌꺼기와 파편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냥 집에 가서 딸딸이나 치든지 구인 광고를 읽어도 될 텐데 말이다.

누군가 와서 그를 도와주었다.

그들이 대충 치웠을 때 식탁을 치우는 담당인지 설거지 담당인지 하는 사람이 대걸레를 들고 나와 바닥을 닦았다.

한두 번 내 발목에 축축하고 더러운 걸레 자락이 닿았다.

인생이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척 연기하라고 배웠을 뿐이다.

간혹 자살 사건이 일어나거나 누군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지만,

대다수의 대중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만사 즐거운 듯 계속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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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8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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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이곳에는 고딕 양식의 회랑이 있는데 요즘 들어 아주 멋지다는 걸 발견했다. 

그러나 그 회랑은 이해할 수 없는 중국어가 들리는 악몽처럼 차갑고 기괴한 느낌이어서, 

아무리 위대한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이라 하더라도 나에게는 다른 세계의 것처럼 느껴진다. 

네로가 지배하던 고대 로마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 세계에 속하지 않은 걸 다행스럽게 여긴다.


낯설게 보이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알제리 군인들, 

사창가, 

처음으로 성체 배령을 하러 가는 귀여운 아를의 아이들, 

미사복을 입은 신부들, 

위험한 코뿔소를 닮은 사람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

이 모두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인다. 


내가 예술적 환경에서만 편안함을 느낀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외로움을 느끼기보다는 농담을 하는 쪽이 더 낫나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을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무 괴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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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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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뭔가를 믿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이 죽음의 질병인데 보통 그렇게 망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깐. 

에너지가 고갈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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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모토 시노부


어떻게든 장례식에 가보려고 생각했지만,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추도식에는 다음과 같은 조전을 보냈다.


구로사와 씨, 사요나라.

히사이타 씨, 기쿠시마 씨, 우에쿠사 씨, 이데 씨, 오구니 씨, 

그리고 구로사와 씨마저 떠나 버려, 작품의 집필자였던 각본가는 노쇠하여 병원의 입퇴원을 거듭하는 나 혼자가 되었고,

추도식에도 출석할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리더인 구로사와에게 부탁합니다. 

모두에게 '하시모토도 좀 있으면 올거야.'라고 전해 주고, 

내가 책상다리를 하고 눌러앉을 자리를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그럼 그때까지는 잠깐이지만, 구로사와 씨 사요나라.

겨울비가 계속되는 기타가루이자와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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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


우리는 엘에이 중심

작은 판잣집에 있었어

침대에는 한 여자가

내 옆에 누워 있었지

그리고 침대 발치에는

엄청 커다란 

개 한 마리

그들이 자는 동안

나는 그들의 숨소리를

들었지

나는 생각했어, 얘들은 나를

의지하고 있구나

이게 웬 괴상한 일이야


나는 아침에도

여전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침을 먹은 후

차로에서 차를

뒤로 빼는 동안

여자와 개는

앞 계단 위에

앉아서 나를 구경했지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어

내가 거리로 나와

도시 속으로 사라질 때

개는 바라보고 있었지


지금 오늘 밤

나는 아직도 그 계단에 앉아 있던

그들을 생각해

그건 옛날 영화 같지

35년 된 영화

나 말고는 아무도

본 적도 이해한 적도 없었던 장면

비평가들이 평범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댄들

나는 그게 참 좋아



50년 전 나는 

버뱅크와 폴리 극장에서

여자들이 몸을 흔들며 옷을 벗는 걸

보았었지


조명이 녹색에서

자주색으로 분홍색으로 바뀌고

음악이 요란하게

진동할 때면

엄청 슬펐고

엄청 극적이었어


이제 오늘 밤 나는 여기 앉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어


하지만 아직도 그 여자들 이름

몇 개는 기억해 : 달린, 캔디, 지넷

그리고 로절리

로절리가 최고였어,

요령을 알았거든


그렇게 오래전 옛날

로절리가 외로운 이들에게

마술을 보여줄 때면

그러면 우리는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뒤틀며

아우성쳤지


지금 로절리

엄청 늙었거나 아니면

땅속에서 엄청

고요해졌겠죠,

여기는 여드름쟁이 소년

그저 당신을

보고 싶어서

나이를 속였더랬죠


당신 좋았어요, 로절리

1935년 일인데,

지금도

조명이

노란색으로 바뀌고

밤이 

천천히 흐를 때면

기억날 만큼 좋았어요.



침대

위로 뛰어오를

고양이처럼

죽음을 기다려


나는 내 아내에게

정말 아주 미안해

그녀는 보게 되겠지 이

딱딱한

하얀 

시체를

한 번 흔들어보고, 그런 다음

어쩌면

또다시

"행크!"

행크는

대답하지 않을 거야

내가 걱정하는 건

내죽음이 아니야. 이 무의

덩어리와 함께

남겨지게 될

내 아내지

나는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어

그래서

그녀 곁에서

잠들었던

그 모든 밤

심지어 쓸모없는

말다툼조차

찬란했던

것이었다고


그리고 내가 두려워서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 어려운

말을

지금은 할 수 있어

나는 당신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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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


한평생, 이 동네를 다니면서 나는 거미줄과 맞닥뜨렸고, 찌르레기에게 공격받았으며,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모든 것이 영원히 지루하고, 절망적이었으며, 저주받았다. 심지어 날씨조차 버릇없고 거지 같았다. 

몇 주 동안 참을 수 없이 덥거나 비가 왔고, 비가 오면 대엿새는 계속 내렸다. 물이 잔디위로 올라와 집 안까지 쏟아져 들어왔다. 

배수관을 계획한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그런 문제에 대해 아는 거 하나 없으면서 잘도 돈을 받아 처먹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일도 마찬가지로 나쁘고, 절망적이며, 태어난 날과 똑같았다. 

유일한 차이라고는 이제 이따금 내가 술을 마신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다. 

술만이, 인간이 영원히 멍청하게 앉아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그저 쪼고 쪼고 내려찍어 깎아 낼 뿐이었다.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나도. 

사람들은 틀에 갇혀 조심스러웠고, 모두 똑같았다. 

그리고 이 씨팔 새끼들과 평생을 같이 살아야겠지, 난 생각했다. 맙소사,

모두 똥구멍과 성기 입과 겨드랑이뿐이야. 똥 싸고 수다 떨고, 말똥만큼이나 지루하지. 

여자애들은 멀리서 보면 예뻤다. 햇빛이 그 애들의 원피스,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입에서 흘러나오는 속마음을 들으면 언덕 아래에 구멍을 파고 기관총을 든 채 잠복하고 싶어졌다. 

내가 절대로 행복해지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결혼이 가능할리도 없었다. 아이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젠장, 접시 닦이 일자리조차 없다. 

어쩌면 은행 강도가 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저주받을 것. 화염과 불줄기가 있는 어떤 것. 

총알은 딱 하나뿐인데, 어째서 창문 닦이가 되겠는가?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언덕을 따라 더 내려갔다. 

기회가 없는 이런 미래에 정신이 흐트러지는 사람은 나뿐이란 말인가?



나는 눈을 감고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천 마리 물고기가 거기서 서로 먹어 치우고 있었다.

삼키고 싸지르는 끝없는 입과 항문. 

온 지구가 그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삼키고 싸고 떡 치는 입들과 항문들.



기계에서는 똑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평화로웠다. 

자동 타이머 장치든지 달아오르는 전등에 붙은 금속 반사 장치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편안하고 긴장이 풀리는 소리였지만, 생각해 보니 의사들이 내게 해준 모든 조치가 다 쓸모없다는 결론이 났다. 

잘되어 봤자 침 때문에 남은 상처를 평생 동안 안고 살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빴지만, 정말 신경 쓰이는 건 그게 아니었다. 

신경 쓰이는 것은 의사들이 나를 치료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논의와 태도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주저했고 염려했지만 뭔가 관심도 없고 따분해했다. 

결국 그들이 뭘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뭔가, 뭐라도 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너무 비전문적일 테니까.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실험해 보고 만약 효과가 있으면 그 치료법을 부자에게 썼다. 

효과가 없더라도 실험해 볼 가난한 자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미래에 대비하려고고 빈민가까지 가보는 연습을 했다. 

거기서 본 광경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 들은 특별히 대담하거나 영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모든 이들이 원하는 것을 원했다. 

또한 정신병자인 것이 분명한데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거리를 걸어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곳과 가장 부유한 곳 양극단 모두에서, 

미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 자유롭게 섞여 지내도 눈감아 준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는 내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아이였을 때 알았듯이, 내게는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알고 있었다. 

살인자, 은행 강도, 성자, 강간범, 수도승, 은자가 될 운명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숨을 수 있는 고립된 공간이 필요했다. 

빈민가는 역겨웠다. 

제정신을 가지고 평범히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지루했고, 죽음보다 나빴다. 

다른 가능한 대안은 없어 보였다. 

교육 역시 덫으로 보였다. 스스로 허용한 약간의 교육 덕택에 나는 한층 더 의심이 생겼다.

 의사들, 변호사들, 과학자들은 뭘까? 

그들은 독립된 개체로서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를 박탈당하도록 눈감은 자들이다. 

나는 내 판잣집으로 돌아가서 술을 마셨다.



그곳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 나는 자살을 생각했지만 내 육체, 내 삶에 대한 이상한 애착을 느겼다. 

흉터가 가득하긴 했어도 내 것이었다. 

나는 서랍장 위 거울을 들여다보며 씩 웃었다. 

어차피 가야 한다면, 여덟, 열, 혹은 스무 명을 데리고 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12월의 토요일 밤이었다. 

나는 내 방에 있었고, 평소보다 훨씬 더 술을 많이 마시면서 줄담배를 피웠고 여자애들과 도시와 일자리와 앞으로 남은 세월을 생각했다. 

앞을 내다보고 있노라니 보이는 광경 중에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었다. 

나는 인간 혐오자도 아니고 여성 혐오자도 아니었지만, 혼자가 좋았다. 

작은 공간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좋은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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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더러운 거미줄을 걷어 내자는 것이 아니고, 거미줄보다 더 더러운 게 호화판 교회 장식품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다 하느님을 모신다고 해도 좋고, 예배당을 거룩한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라 해도 좋습니다. 

하느님이나 성도가 모두 거룩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룩하기 때문에 화려한 장식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만약에 하느님을 그렇게 화려하게 모시고 싶고, 성도들의 사치한 예배당이 필요하다면 

이 세상 어디에나 똑같이 화려하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수인들이 갇혀 있는 캄캄한 지하 감옥에도 계시고, 

기계 소리가 요란한 공장 일터에도 계시고, 

창녀들이 몸을 파는 어두운 뒷골목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갈보리 산 언덕에서 죽은 예수는 진실로 정치와 대결했던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의 모든 정치를 부정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정치를 비판하다 보니 왕의 미움을 샀고, 사제들의 미움을 샀고, 로마의 앞잡이들에게 미움을 산 것입니다.


작년 겨울 어느 날, 보석상 강도범으로 9년형을 받고 징역을 살다 나왔다는 불쌍한 전과범을, 

꾸지람만 실컷 하고는 내쫓듯이 보내 놓고 아직도 마음만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지금 같은 세상에 저 자신이 끔직한 그런 전과자라 해도 이다지 부끄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큰 도둑은 다른 데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그런 좀도둑만이 정죄받는 세상이고 

저도 역시 그 큰 도둑놈의 한패거리니 말입니다.

제가 여지껏 감옥에 가지 못한 것은 누군가 제 대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녁 예배 시간이 되어 우리는 예배당으로 갔다. 

석조 건물의 예배당은 꽤나 넓었다. 몇천 명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을 새워 기도를 하면서 예배당 마루에서 지냈다. 

다음 날 아침엔 기도원 내에 있는 매점에서 고구마를 사서 먹었다. 

날고구마를 그대로 문둥이 청년과 함께 씹어 먹고는 산비탈 소나무 밑에서 잤다.


3일째 되던 날, 문둥이 청년은 더 있을 수 없다면서 기도원을 떠나갔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청년은 주저주저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꽉 마주잡고 산 밑까지 전송을 했다. 

그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가는 뒷모습이 산모퉁이로 사라져 버리자 나는 여태까지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그 뒤 일주일 동안 기도원에 있었지만, 잠시도 그 문둥이 청년의 모습이 눈 앞에서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차라리 그 청년과 함께 어디든 함께 갔더라면 하는 뉘우침까지 일어나는 것이었다. 

길 잃은 양처럼 떠나간 청년을 생각하니 이 넓은 기도원엔 예수님이 안 계신 것 같았다. 

분명히 문둥이 청년을 따라가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수중에 남았던 60원으로 길가 상점에서 두레박용 깡통 하나와 성냥 한 갑을 샀다. 

문둥이 청년이 불현듯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목발을 짚은 청년을 찾으면서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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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91년 9월 12일


경마가 없는 날. 정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묘하다. 헤밍웨이에게 투우가 필요했던 까닭을 난 안다.

그에게 투우는 삶이라는 그림을 끼울 액자 같은 것으로, 자기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일깨워주었으리라.

때때로 그걸 우린 잊어버린다. 기름 값을 지불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등등에 정신이 팔려서.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 제 자신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사람들에게 죽음은 충격이고 공포다. 뜻밖의 엄청난 사건 같다. 옘병, 

어디 그래서 되겠나. 난 죽음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때때로 꺼내서 말을 건다. 

"이봐, 자기, 어찌 지내? 언제 날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하고 있을게."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애도할 일이 아니듯, 죽음도 애도할 일이 아니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인간들이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하는 삶이다. 

인간들은 제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제 삶에 오줌을 싸댄다. 

제 삶을 똥 싸갈기듯 허비한다. 멍청한 씨댕이들, 


그들은 씹질, 영화, 돈, 가족, 그리고 또 씹질, 따위에 너무 몰입한다. 그들 머릿속엔 솜만 꽉 찼다. 

그들은 하느님을 아무 생각 없이 꿀꺽 삼키고, 국가도 아무 생각 없이 꿀꺽 삼킨다. 

그러다 금방 그들은 생각하는 법마저 잊어버리고, 생각도 남들이 대신 하라고 내맡긴다. 골통엔 솜만 꽉 찼다.  

그들은 생긴 것도 추하고, 말하는 것도 추하고, 걷는 것도 추하다. 

수세기 만에 한 번 나올 법한 위대한 음악을 틀어줘도 들을 줄을 모른다. 

대다수 인간들의 죽음은 짝퉁이다. 죽을 게 남아 있어야 말이지.



91년 10월 9일


날 차에 태워 끌고 가던 FBI 녀석들이 골을 내던 게 기억난다. 

"야 이 친구 제법 쿨한데!" 

한 녀석이 성질이 나서 버럭 소릴 질렀다. 

내가 왜 붙잡혔는지, 날 어디로 끌고 가는지 난 묻지 않았던 것이다. 


난 그냥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의미 없는 인생의 그저 또 다른 단면이었을 뿐. 


"잠깐," 내가 말했다. "난 무섭소." 

그 말에 그들은 기분이 좀 좋아지는 듯했다. 

그들은 내게 외계인 같았다. 우린 서로 관계 맺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난 아무 느낌도 없었으니까. 

뭐, 딱히 이상하다고 내가 느꼈다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상했다는 거다. 


난 그저 손들, 발들, 머리들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무언가 이미 마음을 정했고, 난 그들의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난 정의나 논리 따윈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게 내 차지가 된 적은 없었다. 

저들이 무슨 수를 써본들 전체 구조는 결코 의미 있는 것으로 변하지 않을거다. 

아무 것도 없는데 뭘로 좋은 걸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그 자들은 내가 겁내는 꼴을 보고 싶었던 거다. 그들에겐 그게 익숙하니까. 

난 그저 넌더리가 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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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지하 감옥의 나쁜 공기가 차츰 쥘리엥에게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다행이 쥘리엥의 사형 집행 날에는 찬란한 햇빛이 만물에 즐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쥘리엥도 굳건한 용기가 솟았다.

그에게는 대기 속을 걸어 나가는 것이 오랫동안 바다에 나가 있던 항해자가 육지를 산책하는 것처럼 상쾌한 느낌이었다.

자, 만사가 잘되어 나간다. 나도 조금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잘려 나가려는 그 순간만큼 그 머리가 그렇게 시적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한때 베르지의 숲 속에서 지냈던 가장 감미로운 순간들이 한꺼번에 그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끝났으며 쥘리엥은 아무런 가식 없이 최후를 마쳤다.


하루는 그가 푸케에게 이런 말을 했다.

"누가 알겠나? 어쩌면 우리가 죽은 후에도 감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베리에르를 굽어보는 높은 산의 그 작은 동굴에서 쉬고 싶네. 쉰다는 말이 지금 심경에 어울리는 말이야. 자네에게도 몇 차례 얘기했지만, 밤에 그 동굴 속에 들어가 프랑스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지방의 경치를 멀리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야망이 내 가슴을 불태웠지, 그때는 야망이 내 정열이었으니까... 요컨대 그 동굴은 내게 아주 소중한 곳이야. 그리고 그 동굴의 위치는 철인의 마음이라도 끌 만큼 훌륭하다는 걸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걸세.... 그런데 브장송의 수도회 사람들은 돈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는 사람들이니까 자네가 잘만 하면 그들은 내 시신을 자네에게 팔기라도 할 거야..."

푸케는 그 슬픈 거래에 성공했다. 

그는 친구의 시신을 옆에 놓고 자기 방에서 혼자 밤을 세우고 있었다. 그때 놀랍게도 마틸드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는 브장송에서 4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마틸드를 남겨두고 온 길이었다. 마틸드의 눈초리가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를 보고 싶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푸케는 말할 용기도 일어설 기력도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마루위에 놓인 커다란 푸른 망토를 가리켜 보였다.

그 속에 쥘리엥의 시신이 싸여 있었다.

그녀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보니파스 드 라 몰과 마르그리트 드 나바라의 기억이 아마 그녀에게 초인적인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망토를 열었다. 푸케는 고개를 돌렸다.

서둘러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마틸드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촛불을 여러 개 켜놓았다. 

푸케가 힘을 내어 그녀를 쳐다보니,

 마틸드는 자기 앞의 작은 대리석 탁자 위에 쥘리엥의 머리를 올려놓고 그 이마에 키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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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쓰지 말고

모든 생물을 그 어느 것이나 괴롭히지 말며

또 자녀를 갖고자 하지도 말라. 하물며 친구이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른다.

연정에서 우환이 생기는 것임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친구를 동정한 나머지 마음이 얽매이면 손해를 본다.

가까이 사귀면 이런 우려가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애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즐겁게 하고,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마음을 산산이 흐트러 놓는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러한 우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이 내게는 재앙이고 종가이고 화이며

병이고 화살이고 공포다.

이렇듯 모든 욕망의 대상에는 그러한 두려움이 있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치 어깨가 떡 벌어진 코끼리가

그 무리를 떠나 마음대로 숲속을 거닐 듯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임을 즐기는 이에게는

잠시 동안의 해탈에 이를 겨를이 없다.

태양의 후예가 한 말씀을 명심하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다투는 철학전 견해를 초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결론에 도달하여 도를 얻은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남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 갈망하지 말고 남의 덕을 가리지도 말며

혼탁과 미혹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벗을 멀리 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에게 가까이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세상의 유희나 오락이나 쾌락에 만족하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것은 집착이구나.

이곳에는 즐거움도 상쾌한 맛도 적고 괴로움뿐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낚시이다. 라고 깨닫고

현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는 것처럼

또는 불이 다 탄 곳에는 다시 불 붙지 않는 것처럼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러러 보거나 헤매지 말고

모든 감관을 막아 마음을 지켜 번뇌가 이는 일 없이

번뇌의 불에 타지도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마음의 다섯 가지 덮개를 벗겨 버리고

모든 수번뇌를 잘라버려 의지하지 않으며

애욕의 허물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전에 경험했던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리고

또 쾌락과 우수를 버리고

맑은 고요와 안식을 얻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빨이 억세어 뭇짐승의 왕이 된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종벽한 곳에 살기를 힘쓰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간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매임을 버리고

매듭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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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사랑하는 요하네스!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이제 모든 것이 너무 이상하게 여겨져. 나는 너한테 편지를 쓰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아.  나는 그것을 방해하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전에, 내가 아직 활기에 넘쳤을 때라면 너한테 편지를 쓰기보다는 차라리 밤낮으로 괴로워했을 거야. 하지만 이제 나는 죽음을 앞두고 있고, 더 이상 그런 식으로는 생각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내가 피를 토하는 걸 보았고, 나를 진찰한 의사는 내 한쪽 폐가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대. 그런데 왜 내가 더 이상 당혹스러움을 느껴야 하지?

  나는 여기 침대에 누워서 너한테 한 마지막 말들을 생각했어. 그날 저녁 숲 속에서였지. 그때는 그게 나의 마지막 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작별 인사를 하고 너한테 고맙다고 했을 거야. 이제 나는 두 번 다시 너를 못 볼 테니까. 내가 너를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사랑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네 발치에 몸을 내던지고 네 구두와 네가 밟았던 땅에 입 맞추지 않은 것을 지금 사과할게. 나는 어제와 오늘 여기 누워 있으면서, 내가 이곳을 떠나 다시 집에 가서 숲 속을 거닐며 네가내 두 손을 잡았을 때 우리가 앉아 있었던 곳을 찾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 그러면 나는 거기에 누울 수 있고, 너의 흔적을 찾아 그 주위의 모든 풀잎에 입을 맞출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집에 갈 수 없어. 엄마는 내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조금이라도 좋아지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어.

  사랑하는 요하네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은 세상에 태어나 너를 사랑하고 이제 생명에 작별 인사를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해. 여기 누워서 날과 시간을 기다리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상상해봐. 나는 생명과 길거리의 사람들, 마차가 덜거덕거리는 소리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고 있어. 다시는 봄을 보지 못할 거야. 이 집들과 거리와 공원의 나무들은 내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겠지. 오늘 나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서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어. 길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걸 보았는데, 그들은 모자를 들어 올리고 악수를 나누고 무슨 말인가를 하고 소리 내어 웃었어.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얼마 없어 죽을 거라고 생각하자 너무 이상했어. 저기 있는 저 두 사람은 내가 여기 누워서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라. 하지만 알았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악수를 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거야.

  어젯밤에 나는 마지막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어. 내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고, 멀리서 영원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긴 여행에서 돌아왔고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어. 그 느낌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 하지만 엄마는 내가 들은 소리가 고향의 강물 소리와 폭포 소리였을 거라고 생각하셔.

  요하네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하지만 나는 그걸 한 번도 너한테 보여주지 못했어. 나 자신의 천성 외에도 장애가 너무 많았지. 아빠도 자신의 가장 지독한 적이었고, 나는 그런 아빠의 딸이야. 하지만 이제 나는 곧 죽을 테고, 너한테 말하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쓰는 건 때가 너무 늦었어. 더구나 지금은 내가 죽어가고 있으니까 내 편지 따위는 너한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고 자문하지만, 적어도 전보다 더 외로워진 기분은 느끼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에 네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 마치 내가 네 어깨워 손을 볼 수 있고, 네가 편지를 읽을 때 하는 모든 동작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거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해. 너를 부르러 사람을 보낼 수는 없어. 내게는 그럴 권리가 없으니까. 엄마는 이틀 전에 사람을 보내서 너를 부르고 싶어 했지만, 나는 차라리 편지를 쓰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네가 나를 과거의 나, 병에 걸리기 전의 나로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너를 기억해... 내 눈과 눈썹,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아. 그것도 네가 오기를 내가 바라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야. 그리고 관 속에 누워 있는 나를 보러 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어. 나는 안색만 조금 창백할 뿐 살아 있을 때와 거의 똑같아 보일테고, 노란 드레스를 입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네가 와서 나를 보면 후회할지 몰라.

  나는 이 편지를 온종일 이따금씩 쓰고 있어. 그런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의 천 분의 일도 아직 말하지 못했어. 죽어야 한다는 건 너무 끔찍해. 나는 솔직히 죽고 싶지 않아. 아직도 나는 속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어. 봄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조금만 더 좋아지게 해달라고. 봄이 오면 낮에는 밝아지고 나무에는 잎이 나겠지. 내가 다시 좋아지면 다시는 너한테 불쾌하게 굴지 않을게. 나는 얼마나 거기에 대해 생각했는지 몰라! 오오, 하느님. 나는 밖에 나가서 모든 자갈을 만지고, 계단을 지나갈때는 한 걸음마다 멈춰 서서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게 굴 거야. 내가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거야. 내가 살 수만 있다면, 누가 나를 공격하거나 때려도 나는 그 사람에게 미소를 지을테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거야. 나는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어. 누군가를 돕기 위해 뭔가를 해본 적도 없어. 그런데 이 헛된 삶이 끝나려 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죽고 싶지 않은지를 안다면, 아마 너는 어떻게든 해줄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주겠지. 물론 네가 많은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너와 그 밖의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를 놓아주기를 거부한다면, 하느님도 나한테 생명을 주실 거라고 생각했어. 아아, 그러면 나는 얼마나 고마워할까. 내가 삶을 허락받기만 한다면 다시는 누구한테도 못되게 굴지 않고, 내 운명이 무엇이든 거기에 미소를 지을 거야.

  엄마가 곁에 앉아서 울고 계셔. 엄마는 한밤중에도 줄곧 여기 앉아서 나를 위해 기도하셔. 이것이 조금은 나한테 도움이 돼. 작별의 쓰라림을 누그러뜨려주니까. 오늘 나는 생각했어. 어느 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너에게 다가가, 더 이상 너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않고 미리 사놓은 장미 한 송이를 건네면 너는 어떻게 할까?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더 이상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없다는 걸 기억해냈어. 죽을 때까지 다시는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는 가만히 누워서 슬픔에 잠겨 끊임없이 울고 있어. 소리 내어 울지만 않으면 가슴은 아프지 않아. 요하네서, 내 사랑하는 친구.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한 유일한 사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 나에게 와서 여기 잠시만 있어줘. 그러면 나는 울지 않고 네가 와준 것이 기뻐서 최선을 다해 미소를 지을 거야.

  아니, 내 자존심과 용기는 어디로 갔지? 나는 이제 아버지의 딸이 아니야. 내 용기가 나를 떠났기 때문이지. 나는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어. 이 마지막 날들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괴로워했어. 네가 외국에 있을 때도 괴로웠고, 내가 봄에 시내에 온 뒤로는 날마다 괴로워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밤이 얼마나 끝없이 길 수 있는지, 전에는 몰랐어. 나는 길거리에서 너를 두 번 보았지. 한 번은 네가 내 옆을 지나가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너는 나를 보지 못했어. 나는 세이어 댁에서 너를 만나기를 바랐지만, 너는 오지 않았지. 거기서 만났더라도 너한테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는 않았겠지만, 그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했을 거야. 하지만 너는 오지 않았어. 그때 나는 네가 오지 않은 게 아마 나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어. 열한 시에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더 이상 기다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거든. 그래, 요하네스, 나는 얼 사랑했어. 내 평생 오직 너만을 사랑했어.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빅토리아야. 하느님이 내 어깨 너머로 이 편지를 읽고 계셔.

  이젠 너한테 작별 인사를 해야 해. 어두워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잘 있어, 요하네서. 날마다 고마워. 지구에서 날아갈때도 나는 끝가지 너한테 감사하고, 가는 동안에도 줄곧 네 이름을 속으로 부를 거야. 평생 행복하게 살고, 너한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줘. 네 앞에 몸을 던져 용서를 빌지 않은 것도 용서해줘. 나는 지금 진심을 다하여 너한테 용서를 빌고 있어. 행복해야 해, 요하네스. 그리고 영원히 안녕. 모든 날들과 모든 시간에 대해 다시 한 번 너한테 감사할게. 이젠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어.

너의 빅토리아가

 

  이제는 등불을 켜서 훨씬 밝아졌어. 나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다시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 있었어. 다행이 이번에는 그렇게 불쾌하지 않았어. 음악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곳은 어둡지 않았어. 나는 너무 감사하고 있어. 하지만 이제는 글을 쓸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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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자오선

한 번 만난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야생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둘은 걸어갔지. 어느덧 갈림길에 이르자 젊은이는 마구업자에게 이렇게 멀리까지 배웅해 주어 고맙다고 말하고는 헤어져 걸어갔네. 하지만 마구업자는 친구와의 작별을 견딜 수 없었는지 소리쳐 불러서는 다시 함께 걸어갔네. 길이 점점 어두운 숲 속으로 이어지자 마구업자가 젊은이를 죽였어. 돌로 쳐 죽이고는 옷과 시계와 돈을 빼앗은 뒤 길가에 땅을 파 시신을 묻었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지. 돌아가는 길에 자기 옷을 갈기갈기 찢고 부싯돌로 상처를 내서는, 아내에게 길에서 강도를 만나 젊은 여행자는 죽고 자기만  간신히 달아났다고 말했지. 부인은 대성통곡하더니 남편에게 그곳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는, 사방에 지천으로 핀 야생 앵초꽃을 꺾어 돌무덤에 얹었어. 부인은 늙을 때까지 몇 번이고 그곳에 갔지. 마구업자는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살았지만, 다시는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았네. 그는 죽어 가며 아들에게 자신이 한 짓을 고백했지. 그러자 아들은 자기가 그런 자격이 있다면 기꺼이 아버지를 용서하겠노라고 말했고, 마구업자는 아들에게 자격이 있다고 단언하고는 죽었지. 하지만 아들은 사실 전혀 유감스럽지 않았어. 그 죽은 젊은이를 내심 질투했던 거야. 아들은 무덤에 가 돌을 헤집어 놓고 뼈를 파내 숲에다 마구 내동댕이친 다음 고향을 떠났어. 서쪽으로 가 스스로 살인마가 됐지. 늙은 여인은 그때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는 야생 짐승이 무덤을 팠나 보다고 여겼지.  뼈를 다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무덤을 복원할 수는 있었지. 여인은 돌을 쌓고 또 쌓으며, 예전처럼 꽃을 바쳤어. 여인이 아주 늙어 할머니가 되자 사람들에게 그곳이 자기 아들의 무덤이라고 말하고 다녔지. 아마도 그 무렵에는 아들도 이미 죽고 없었을 거야.


서로의 목숨을 걸고 카드 게임을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지. 이 이야기를 다들 들어 보았겠지? 카드 한 장에 우주 전체가 걸려 있는 셈이야. 내가 저자의 손에 죽을지, 아니면 저자가 내 손에 죽을지 지금 이 순간 결판나지. 한 인간의 가치를 이보다 더 확실히 유효화할 수 있는 것이 달리 뭐가 있겠나? 궁극적 상태로의 게임의 확장은 운명이라는 개념에 관해 이론의 여지를 깡그리 없애지. 다른 인간에 대한 한 인간의 선택은 절대적이고 취소 불가능한 선호이며, 신의 섭리나 의미를 헤아리지도 않고 그런 심오한 결정을 평가하려 드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라네. 패자의 절멸이라는 판돈이 걸린 게임에서 의사 결정은 매우 명확하지. 손에 특정 패를 쥐고 있는 자는, 따라서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네.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속성이야. 일단 게임에 판돈이 걸리면 권위와 정당화는 저절로 생겨나네. 보라고, 전쟁은 가장 진실한 형태의 예언이야. 더 큰 의지 안에서 한쪽의 의지와 다른 쪽의 의지를 실험하지. 사실상 그 둘을 함께 묶어 서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바로 더 큰 의지라네. 전쟁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단일화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게임이지. 전쟁은 바로 신이야.


소년은 총칼과 밧줄로 죽음을 맞는 이들을 보았고, 자신을 2달러에 판 여인이 그 2달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보았다. 중국 땅에서 온 배가 작은 항구에 사슬로 묶여 있고, 고양이처럼 말하는 자그마한 누런빛의 사람들이 칼로 화물을 열어젖혀 차와 비단과 향신료를 들어내는 것을 보았다. 꿍어랟는 시커먼 바다를 가파른 바위가 어르는 고독한 해변에서 드넓은 날개를 쫙 펴고 날아오르며 다른 새들을 난쟁이처럼 보이게 하는 독수리가 제비갈매기나 물떼새처럼 새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았다. 모자 하나에 다 담을 수도 없을 황금 더미가 카드 한 장에 모조리 날아가는 것을 보았고, 우리에 갇힌 곰과 사자가 야생 수소와 싸워 목숨을 잃는 것도 보았고, 샌프란시스코가 잿더미가 되어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는 것을 두차례나 지켜보았다. 말을 타고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던 소년은 하늘을 등지고 밤새 타오르는 도시와, 돌고래가 불꽃 사이로 솟아오르는 시커먼 바닷물에 드리워진 불구덩이를 보며 불길에 와락와락 뜯기는 목재의 추락과, 길 잃은 자들의 비명을 들었다. 


사건이든 의식이든 모두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일어나는 거라네. 서곡에는 어떤 결정적 사건이 포함되지. 저 커다란 곰의 죽음 같은 것 말이네. 심지어 각 사건의 정당성을 의문시하는 이들에게 조차도 오늘밤이 유별나거나 특이하게 보이지는 않을 거네. 그렇게 흘러가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지. 의식도 마찬가지야. 일부에서는 의식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고, 규모가 크고 작은 사건만이 있을 뿐이라고들 하지. 그 말이 맞다면 종교 의식 역시 특정 규모의 사건에 불과해. 종교 의식에는 반드시 피가 포함되어야 해.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된 종교 의식이라고 할 수 없지. 여기 있는 누구나 가짜 의식을 단번에 알아보지. 그렇고말고, 어린애애게 고독감을 일깨우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젖가슴이 주던 감촉이야. 모두가 사라지고 사냥감만이 그 고독한 참가자와 남게될 때도 마찬가지지. 그 고독한 사냥감은 결코 적이 아니야.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곳에서나 그렇지. 시선을 피하지 말게. 우리는 지금 외계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네. 남자라면 누구나 그 감정을 잘 알고 있지. 공허와 절망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던가? 피는 바로 그 감정이 바짝 굳지 않도록 해 주는 완화제이지 않은가? 판사가 바싹 기대었다.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누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인가? 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가? 아니면 인간이 감히 논할 수 없는 주제인가? 죽음이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이고자 하는 걸까? 나를 보게.


운명은 끝내 피할 수 없어. 판사가 말했다.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지. 자기 운명을 알고서 일부러 반대의 길을 택한 자들도 결국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운명을 맞게 되네. 운명이란 이곳 세계만큼이나 거대하여 반항자까지도 다 품고 있거든. 너무나 많은 이들이 파멸하고 만 이곳 사막은 너무도 광대하여 우리 마음을 마구 끌어당기지만 사실상 텅 비어 있지. 황량한 불모지일 뿐이야. 사실상 거대한 돌덩어리지. 

판사가 술잔에 술을 따랐다. 마시게. 세상은 계속된다네. 우리는 밤마다 춤을 추고, 이 밤도 예외가 아니네. 굽은 길이든 곧은 길이든 다 똑같아. 우리 둘이 헤어진 후 얼마 만에 다시 만난 건가? 인간의 기억이란 불확실하고, 존재했던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와 거의 다를 바 없지. 그는 판사가 술을 따라 준 잔을 집어 들이켜고는 다시 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판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온갖 곳을 돌아다녔고, 여기도 그저 그중 하나일 뿐이오. 

판사가 눈썹을 활처럼 휘였다. 자네, 목격자라도 배치해 두었나? 자네가 그곳을 떠난 후에도 그곳이 계속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누가 알려 주던가? 

헛소리 작작 해요. 

그래? 어제는 어디 있나? 글랜턴과 브라운은 어디 있고, 신부는 어디 있나? 판사가 바싹 기대었다. 사막에서 자네가 엘리아스의 손에 내버려 둔 셸비는 어디 있나? 산에서 자네가 버리고 도망간 테이트는? 자네가 지켜 주기로 약속한 공화국의 적들을 무찔러 피칠갑을 하고서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을 때 주지사의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추었던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어디 있나? 바이올린 연주자와 무용수는? 

그야 당신이 잘 알겠죠. 

이것 하나는 알지. 전쟁이 불명예가 되고 전쟁의 고귀함이 의문시된다면 피의 신성함을 아는 명예로운 이들은 무도회에서서 쫓겨날거네. 춤이야말로 전사의 권리이기에 결국 무도회는 가짜 무도회가 되고, 춤을 추는 이도 가짜가 되는 거지. 하지만 언제나 진정한 춤을 추는 이가 한 명 정도는 있다네. 누군지 아나?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 말은 자네가 아는 것보다 더욱 진실하다네. 하지만 이 말을 해주고 싶군.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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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스키


그때 난 동거중인 여자가 있긴 했지만 그 여자도 집에 없을 때가 많아 나도 외로운 편이었다. 내 옆에 서 있는 큰 엉덩이 때문이라도 외로웠다.


조이스는 마침내 달팽이를 삼켰다. 그러더니 접시에 담긴 다른 것들도 찬찬히 살폈다.

'모두 작은 똥구멍이 달렸어! 끔찍해! 끔찍하다고!'

'똥구멍이 뭐가 끔찍해?'

조이스는 냅킨을 입에 갖다 댔다. 그녀는 일어나더니 화장실로 달려갔다. 조이스는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에서 화장실에 대고 소리쳤다.


'똥구멍이 뭐가 나쁘냐고! 당신한테도 똥구멍은 있잖아. 나도 똥구멍이 있다고! 가게에 가서 큼지막한 쇠고기 스테이크를 하나 사봐. 거기도 똥구멍은 달렸어! 지구상에는 똥구멍이 널렸단 말이야! 어떤 면에서는 나무들도 똥구멍이 달렸는데 못 찾는 것뿐이야. 나무들도 이파리를 싸잖아. 당신 똥구멍, 내 똥구멍, 세상에는 수십억 개의 똥구멍으로 가득 찼어. 대통령도 똥구멍이 있고, 세차장 직원들도  똥구멍이 있어. 판사들도 살인자들도 똥구멍이 있다고. 심지어 자주색 넥타이핀 남자도 똥구멍은 있어!'

'아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그녀는 다시 구역질을 했다. 시골 촌년. 나는 사케를 따서 한 잔 마셨다.


나는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그건 인정해야지.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나왔다.

'이거 맞히기 쉽네. 하지만 당신은 그자하고도 원만하지 못할 거야. 행운을 빌어. 당신의 이런저런 점 때문에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 알고 있을거야. 단지 돈 때문이 아니고.'

조이스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엎드린 채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저 촌년, 응석받이로 자라서 불안정한 애일 뿐이었다. 저기서 아무런 가식 없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울고 있었다.

베티는 아이가 둘 있었지만, 둘 다 베티를 찾아오는 법이 없었고 편지를 보낸 적도 없었다. 베티는 이제 싸구려 호텔의 청소부였다. 처음 베티를 만났을 때 그녀는 비싼 옷을 입고 있었고 날씬한 발목에 비싼 구두를 신고 있었다. 몸매가 탄탄했고 아름답다고 할 만했다. 눈은 야성적이었다. 잘 웃었다. 부자 남편을 만났다가 이혼했는데, 그는 음주 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로 죽어서 코네티컷에서 화장되었다. <저 여자를 길들일 순 없을 거야.>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저 꼴이었다.

신부는 맨날 하는 소리를 읊었다. 나는 듣지 않았다. 관이 있었다. 과거에 베티였던 존재가 그 안에 있었다. 아주 더웠다. 해가 지면서 노란 침대보처럼 빛이 깔렸다. 파리 한 마리가 빙빙 돌았다. 반쪽짜리 장례식이 반쯤 지났을 때 작업복을 입은 두 남자가 내 화환을 들고 왔다. 장미는 시들어 있었다. 더위 속에서 시들어, 시들었고, 시들고 있었다. 그들은 그 물건을 가까운 나무에 기대 놓았다. 장례 미사가 거의 끝나갈 때 호환이 앞으로 기울더니 철퍼덕 엎어졌다. 아무도 세우지 않았다. 그때 미사가 끝났다. 나는 신부에게로 가서 악수를 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미소짓는 사람이 둘이 되었다. 신부와 마샤. 오는 길에 래리가 다시 말했다. '묘석은 어떻게 할지 편지를 쓸게요.' 나는 아직도 그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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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5 . 30 월요일

 

나의 어린 벗이여,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너를 여러 방향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도 있다.

소위 유혹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으며, 너는 사회의 잔인성에 의해 갈가리 찢겨질 수도 있다.

물론 너는 그것을 혼자 견뎌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력이나 결정 또는 욕망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네가 네 주변과 자신 안의 잘못된 것들을, 잘못된 감정이나 희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거기에서부터 자각이 지성이 시작된다.

너는 너 자신에게 등불이 되어야만 하며, 그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단지 이러한 모든 것들을 너에게 지적해주었을 뿐이다.

그것은 사실들이 너를 두렵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바로 보아야 할 사실들이 있을 뿐이다.

만약 네가 그것들을 제대로 본다면, 그것들은 결코 너를 두렵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들은 공포스럽지 않다.

그러나 만약 네가 그것을 피해서 달아나기를 원한다면, 등을 보이고 달아난다면,

그것들은 너를 두렵게 할 것이다.

네가 지금까지 행해온 것들이 완전히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견뎌라.

사실과 함께 살아가며 그것들을 너의 취향이나 반응의 형식에 따라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살아라.

복잡하거나 모순되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말고, 오직 내적으로 단순해져라.

너는 오늘 아침 테니스를 쳤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는데 상당히 잘 치는 것 같더구나.

 아마도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네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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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5. 12 목요일

 

우리는 진지하게 묻는다.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슬픔과 그의 완전한 고독 그리고 혼란, 근심 등을 끝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외적인 대행자, 신을 포함한 외적인 대행자가 존재하는가?

인간은 언제나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을 견디며, 그것들에 익숙해지며

또 그것들이 우리 삶의 일부라고 말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세계 도처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것을 참고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외적인 어떤 것에 도움을 청하기 위한 조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조직은 평화를 기구하고, 평화를 위한 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그 안의 인간의 마음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인간을 변화시킬 것인가?

 인간은 끝없이 고통을 당해왔으며, 공포에 사로잡혀왔으며 또 쾌락을 추구했다.

이것이 인간의 삶의 과정이었으며, 아무것도 그것을 변화시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렇다거나 인생은 그렇다는 식으로

 

삶의 모든 것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비탄에 빠지거나 화를 내는 대신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변화될 수 있는가?

분명히 외적인 대행자에 의해서는 변화될 수 없다.

인간은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서 어떤 도움도 요청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을 검토해야 한다.

인간이야말로 인간 자신의 스승이다. 인간은 이 사회를 만들어왔고 또 그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바로 그 책임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스스로 안에 변화를 일으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사유는 너무나도 무관심하고 무책임하며,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삶의 충족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이상화시키지만 여전히 이기적인 채로 남아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은 염세주의자가 되는 것도 또 낙천주의자가 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당신 자신과 당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당신은 결코 그 사실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사실로부터 도피한다면 당신은 결코 이 지상에서 평화를 가질 수 없을 것이며

결코 지속적인 기쁨이나 축복의 감정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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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3. 10 목요일


멀리서 올빼미 우는 소리가 들리고 그 반대쪽 계곡에선 낮고 깊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은 새벽이다.

하루의 소음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고요하다.

해가 떠오르는 곳은 어딘지 신비롭고 성스럽다.

거기에는 여명에 대한, 신비롭고 고요한 빛을 향한 기도와 찬송이 있다.

그 이른 아침 햇살은 부드러웠고 미풍조차 불어오지 않았다.

모든 식물들, 나무와 풀들은 고요하고 또 평온하게 앉아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명은 신비한 고요로 천천히 대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밝아오기 시작했고, 해는 산봉우리를 정결한 금빛으로 물들였다.

산꼭대기의 눈은 햇살과 함께 순결하고 깨끗히 빛났다.


당신이 산 아래로 난 오솔길을 따라 

작은 마을을 떠나 산으로 올라가자, 대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뚜라미와 메추라기, 그리고 온갖 다른 새들은 새로운 날의 숭배로 넘치는 아침노래와 찬송을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면 당신은 생각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빛의 일부가 된다.

당신은 스스로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영혼은 그것의 투쟁과 고통들을 깨끗이 비워내었다.

당신이 산길을 따라 걸어올라갈 때면 혼자 있다는 느낌마저 사라졌다.

아침 안개는 게곡을 따라 서서히 움직였고,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질수록 당신은 삶의 환상과, 낭만과, 순진무구함으로 빠져들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 당신은 산을 내려왔다.

바람과 풀벌레들의 속삭임, 새들의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당신이 산을 내려오자 안개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새벽의 영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거리와 상점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당신은 틀에 박힌 일상의 삶을 시작한다.

당신은 반복되는 업무에 사로잡힌 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 속에서, 자연과의 동일화를 잃어버린 채, 

이데올로기의 분열 속에서 전쟁을 준비하며, 

당신 안의 고통과 인간의 영원한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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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도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살라마노의 개나 그의 마누라나 그 가치를 따지면 매한가지다. 자동인형 같은 그 작은 여자도, 마송과 결혼한 그 파리 여자도 마찬가지로, 또 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던 마리나 마찬가지로 죄인인 것이다. 셀레스트는 레이몽보다 낫지만, 셀레스트와도 마찬가지로 레이몽도 나의 친구라고 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마리가 오늘 어떤 새로운 뫼르소에게 입술을 내준다해서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이해하느냐고, 이 사형수를, 그리고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이런 모든 것을 외쳐대며, 나는 숨이 막혔다. 그러나 벌써 사람들이 사제를 내 손아귀에서 떼어내고 간수들이 나를 위협했다. 그러나 사제는 그들을 진정시키고, 잠시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히 괴어 있었다. 그는 마침내 돌아서서 사라졌다.

 그가 나가버린 뒤에, 나의 마음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 위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기 때문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왔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인생이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가졌는지, 왜 생애를 다시 시작해보는 모험을 했는지 나는 이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잠시 머무는 휴식시간 같았었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그녀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내게서 악을 몰아내고 희망을 비워 주기라도 한 듯이, 징조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마주해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았고, 마침내 그토록 형제같이 느껴지자, 나는 행복했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서,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기 위해서, 내게 남은 바람은,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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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10월 4일


 전 세계의 제도와 조직은 인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 다양한 물질적 조직을 만들었다. 전쟁과 민주주의, 독재정치 그리고 종교적 제도, 모두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지속되어 왔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우러러 보며 외면적 또는 내면적으로 도움을 받고 싶어한다. 욱신대는 내면의 상처와 시간의 그림자, 아득한 생각까지 모두 말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종류의 제도가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인간의 내면을 바꾸지 못했다. 제도는 절대 인간을 근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바꿀 수 없다. 그럼에도 왜 인간이 이런 제도를 만들어내 도움 받고 싶어 하며 오랫동안 지속되는 안정감을 추구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이상할 만큼 궁금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대립하는 더 많은 제도와 조직을 만들어내고 있다.


왜 우리는 예민함이라는 몹시 연약한 감각을 점점 잃어가는 것일까? 문제와 혼란뿐 아니라 우리에 관한 모든 예민함 말이다.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예민함이 아닌 그저 세심해지는 것. 예민해진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고작 며칠 전에 태어났지만 폭풍우와 비, 어둠, 그리고 빛에 맞서야 하는 어린 나뭇잎처럼 연약해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연약해졌을 때 상처받는다. 상처를 안고 스스로 뒤로 물러나 주위에 벽을 짓고 단단하고 또 잔인해진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추악하고 잔인한 반응 없이 모든 움직임과 세상에 연약해질 때, 후회와 상처, 스스로를 강요하는 훈육 없이 세심해질 때, 비로소 측정 불가능한 존재의 자질을 가질 수 있다.우리는 이런 연약함을 소음과 잔인함, 천박함 그리고 하루하루의 혼잡함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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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 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 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허리를 굽혀서 나는 그저 금붕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참 잘들도 생겼다. 작은놈은 작은놈대로 큰놈은 큰놈대로 다 싱싱하니 보기 좋았다. 내려 비치는 오월 햇살에 금붕어들은 그릇 바탕에 그림자를 내려뜨렸다. 지느러미는 하늘하늘 손수건을 흔드는 흉내를 낸다. 나는 이 지느러미 수효를 헤어 보기도 하면서 굽힌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았다. 등이 따뜻하다.

나는 또 오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우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그 오탁의 거리 속으로 섞여 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나서서 나는 또 문득 생각하여 보았다. 이 발길이 지금 어디로 향하여 가는 것인가를…… 그때 내 눈앞에는 아내의 모가지가 벼락처럼 내려 떨어졌다. 아스피린과 아달린.

우리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느니라. 설마 아내가 아스피린 대신에 아달린의 정량을 나에게 먹여 왔을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는 없다. 아내가 대체 그럴 까닭이 없을 것이니, 그러면 나는 날밤을 새면서 도둑질을 계집질을 하였나? 정말이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 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발길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좀 어려웠다. 가야하 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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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3월 18일 금요일


인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본다. 행복하고 온화하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은 채 소리 지르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미래는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미래는 곧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역사 속에서 수천 년간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우리는 고역과 함께 인생을 살아왔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크게 집중하지 않는다. 한두 개의 채널을 제외한 텔레비전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가벼운 오락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물론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광고를 보면서도 계속 즐거워한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 경기장의 몇몇 선수들을 지켜보며 삼사천 명의 사람들이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응원한다. 성대한 대성당에서 열리는 의식을 지켜보는 것도 오락의 한 형태다. 신성하고 종교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감정적이고 낭만적인 경험이며 독실함을 느끼게 하는 오락에 불과하다.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오락과 재미,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을 보며 과연 우리의 미래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과 똑같고, 단지 형태만 바뀌어 계속되는 것인가? 다양한 형태의 재미인 것인가?


20세기는 두 번의 지독한 전쟁과 변증법적 물질주의, 종교적 신념과 활동 그리고 의식에 대한 회의로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 역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는데 컴퓨터가 완전히 개발되고 나면 우리는 더 많은 변화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변화의 시작점에 서 있다.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고 나면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미 서서히 진행되고 있듯이 오락산업이 번창하게 되면 젊은 사람과 학생, 어린 아이들은 유흥과 하려함, 낭만적인 쾌락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그로 인해 절제와 검소라는 단어는 그들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질 것이다. 수도승과 고행자는 속세의 것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몸을 한낱 천이나 의복으로 감싸며 검소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속세에 대한 그들의 부정 역시 진정한 의미의 검소함은 아니다. 아마도 당신은 검소함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의미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즐거움을 갈망하고 오락이나 종교 또는 다른 어떤 것을 통해 자신에게서 도망가도록 길러져왔다. 게다가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기분을 반드시 표핸해야 하며 어떤 형태로든 자제하거나 표출하지 않는 것은 해롭다고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다양한 형태의 강박관념에 빠지게 되고, 당연히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도와주는 스포츠와, 오락, 유흥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늘 자신과 자신의 미래로부터 도망쳐왔다. 또한 우주와 매일매일의 일상, 삶과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쳐왔다. 하지만 자신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도망쳐서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헤맨다고 하더라도, 갈등과 기쁜, 고통, 두려움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지워버릴 수가 없다. 억누르려고 노력하고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쓸 수 있겠지만, 결국엔 이것들은 늘 수면 위로 올라 오고만다. 기쁨 역시 떨쳐버릴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기쁨 또한 똑같은 갈등과 고통 그리고 지겨움을 지니고 있다. 기쁨의 피로함과 조바심 모두 혼란스러운 인생의 일부다. 안타깝지만 벗어날 수 없다. 생각과 나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 신중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히자 않는 한 이런 깊은 혼란에서 도망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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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섹스에 관한 단상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두 가지 문제는 사랑과 섹스이다. 사랑은 추상적인 관념이고 섹스는 실제 생활의 육체적 충동이다. 이것은 분명 존재하며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를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실제 있는 그대로 알아보자. 

과연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사고가 쾌락으로써 배양한 관능적 기쁨인가, 아니면 크나큰 기쁨이나 정적인 즐거움을 주었던 경험을 상기하는 것인가? 

석양의 아름다움, 당신이 만지거나 보는 가녀린 잎새, 혹은 당신이 냄새맡는 꽃향기가 사랑일까? 

사랑은 쾌락인가, 아니면 욕망인가? 혹은 이 둘 다인가? 

사랑은 신성한 것과 비천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사고가 결코 깨트릴 수 없는 분리 불가능한 전체인가? 

사랑은 대상 없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대상이 있을 때만 생기는가? 

당신이 한 여인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사랑이 당신 안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랑은 사고가 지속성을 부여하는 감각, 욕망, 쾌락인가? 아니면 사랑은 다정함처럼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당신 안의 어떤 상태인가? 

사랑은 대상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사고가 배양한 어떤 것인가, 아니면 사고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라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것인가? 

사랑이란 낱말과 그 배후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섹스에 관한 번뇌에 시달리거나 노이로제 상태가 되며, 나아가 섹스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사랑은 사고에 의해 조각나서는 안 된다. 사고가 사랑을 조각내버릴 때, 그때는 더는 사랑이 아닌 전혀 이질적인 것, 즉 기억, 프로파간다, 위안, 편리함의 산물이 되고 만다.

섹스는 사고의 산물일까? 

섹스 안엔 쾌락, 기쁨, 우애, 정다움이 들어 있는데 이런 것은 사고에 의해 강화되어 떠오르는 감정일까? 

성적인 행위 속엔 자기망각, 자기포기, 두려움과 근심, 걱정들이 사라지는 감각이 있다. 이러한 다정함과 자기포기 상태를 기억하고 되풀이하기를 바라면서, 말하자면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되씹고 있다. 이런 것이 다정함인가, 아니면 이미 끝나버렸지만 반복을 통해 다시 붙잡고 싶어서 단순히 회상하는 것인가?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도 반복하는 것은 파괴적인 과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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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런데 죽음이란 무엇인가? 육체적인 개체가 끝나는 것 말고, 죽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질문을 하려면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해야 한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그것은 자신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아내와 아이들과 남편과 모든 것들과의 끝없이 이어지는 힘든 싸움이며 전쟁터다. 그것은 슬프고 두렵고 불안하며 죄를 짓고 외롭고 또 절망하는 싸움이다. 그리고 이 절망 때문에 마음은 이런 저런 신이나 구세주, 성인들, 영웅숭배, 종교의식 그리고 서루 죽이는 실제의 전쟁 같은 것들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안에는 한 순간의 기쁨이나 이따금 반짝하고 눈을 빛내는 일도 있기는 하겠지만 어쟀든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또 '난 적어도 그걸 알고 있고, 그거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 ' 하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 삶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있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종말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죽음일 피할 수 없게 되면 싸워서 물리친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과 주위의 모든 것들과의 길고 지루한 필사적인 싸움이다. 우리는 이 싸움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성적으로든 다른방법으로든 만족시켜야만 하는 커져가는 쾌락이요, 쌓여가는 욕망이다. 그 모든 것이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디는 우리의 삶이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시간의 노예이다. 과거가 축적해놓은 모든 경험과 더불어 어제의 기억, 과거의 기억인 시간 말이다. 그것은 특정한 한 개인의 것인 그대의 기억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통틀어 집단, 민족, 인간의 기억이기도 하다. 과거는 인간의 개별적이며 집단적인 슬픔과 불행과 기쁨 삶 죽음 진실 사회에 맞서 싸운 그의 놀라운 투쟁들이 모여 만들어딘다. 그 모두가 과거 즉 수천겹으로 쌓인 어제이며,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현재란 미래를 향해가는 과거의 움직임일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아주 정확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없다. 현재에 의해 수정된 과거에 있었던 일은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아는 전부다. 미래는 현재의 사건들로 수정된 과거이며, 내일은 오늘의 체험과 반응과 지식으로 모습을 바꾼 어제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간은 두뇌에 의해 편집된 것이며, 두뇌는 시간 즉 수많은 어제가 쌓인 결과다. 모든 생각 하나하나가 시간의 결과다. 그것은 기억에 대한 응답이며, 어제의 바람, 좌절, 실패, 슬픔, 눈앞에 닥친 위험들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을 배경으로 해서 삶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신이 있든 없든 간에, 국가의 기능이 무엇이고 관계의 본질이 무엇이며 시기 불안 죄책감 절망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고 자신을 거기에 어떻게 적응 시키는가. 우리는 시간이라는 배경을 가지고서 이 모든 의문점들을 바라본다.

  무엇이든 그런 배경을 가지고서 바라보면 다 일그러진다. 그리고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하는 외침이 아주 클 때 과거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면, 신경질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스스로 거기에 방어벽을 세우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든 작용이다.

  우리는 영원히 과거의 관점에서 현재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과거에 있었던 일에 연속성을 주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다. 우리는 매일 삶에서 일어나는 뜻하지 않은 사건들을 과거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서 만나며, 그에 따라 미래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마음을 의식 뿐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관찰한다면, 그것이 과거라는 것, 그 속에는 새로운 게 아무것도 없고 과거와 시간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과연 이 현재가 과거와 접촉하지 않은 현재라 할 수 있는가? 미래를 제약하지 않는 현재가 있는가?


  나는 세계이고, 세계는 나다. 내 의식은 새계의 의식이다. 내 의식의 내용은 세계의 의식의 내용이다. 그 내용은 생각 즉 내 가구, 내 이름, 내 가족, 내 은행잔고, 내 신앙, 내 교리에 의해 편집되고, 그 모든 것은 내 의식 안에 있으며, 그것이 곧 세게의 의식이다. 그걸 알지 못하면 우리가 알아내고자 하는 것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하나의 물질적 작용인 그 의식에는 끝이 있다. 질병이나 사고나 뭐 그런 것들로 인해 유기체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두뇌도 퇴화하고 따라서 생각의 작용도 끝난다. 자기나 나를 편집하는 생각의 작용이 끝난다는 말이다. 그대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군. 그렇다면 내가 묻겠다. 의식은 나이며 곧 세계인데, 생각이 의식이라고 편집해 놓은 모든 것들을 지금 버리는게 가능한가? 


  그대가 죽을 때는 몸이 사그라지고 두뇌가 멈춘다. 그리고 의식 안에 있는 모든 내용이 지금처럼 계속될 수 없다. 그것이 생각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자신 그리고 그대에게 묻는다. 나는 나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대에게 묻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그대에게 묻고있다. 이 모든 이유 즉 이치를 알고 있는지, 더 나아가 이치를 뛰어넘을 수 있는지, 그대가 세계이고 세계가 그대라는 사실, 그대의 의식이 세계의 의식이라는 사실을 넘어설 수 있는지, 그대가 그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을 때 생각에 의해 편집된 모든 일들을 끝낼 수 있는지, 50년 후가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내 의식의 일부는 내가 믿는 것이다. 믿음은 내 의식의 일부이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는 세상을 바로 잡아라. 그들은 신을, 완벽한 국가를, 자신의 경험을, 예수를, 붓다를 믿는다. 믿는 것은 인간들이 흔히 하는 행위이다. 그 믿음은 생각에 의해 편집되는데, 그것이 물질적 작용이다. 그대가 죽을 때 끝내려고 생각하듯이, 그 믿음을 지금 끝낼 수 있는가? 뭔가에 대한 그대의 믿음을 즉각적으로 끝내고, "난 내 믿음을 버리는 게 두려워,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말할 수 없이 안심이 되거든." 이라고 말하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그대는 어떤 착각 속에서 안심하고 싶어하지만, 그건 전혀 안심이 아니다. 그대 그것을 지금 버릴 수 있는가? 어떤 특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를 버릴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모든 인간이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주 놀라운 현상이다. 그게 무엇이든, 고귀하든 천하든, 실제적이든 아니든, 그런건 문제가 아니다. 이상은 분명 생각에 의해 편집되며, 지금 그대로의 나에 반대되는 물질적 작용이다. 그러니 그걸 버릴 수 있는가?


  우리의 일상생활은 생각에 의해 편집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은 물질적 작용이다. 그걸 다르게 말해 보겠다. 한 인간이 자기의 슬픔과 불행과 혼란을 끝내지 않고 있다. 그때 그는 이 세상의 다른 것들과 닮아 있다. 그는 죽지만, 슬픔과 혼란과 불행은 넓디넓은 한 흐름으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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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인간은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을 두려워 하고 신들을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이 권력과 공격을 낳습니다. 똑똑한 이들은 공포를 알지만 이를 해결할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와 교회를 통해 이 공포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공포는 사고를 통해 극복될 수 없습니다. 사고 자체가 공포를 만들기 때문이죠. 사고가 멈추었을 때에야 공포가 사라질 가능성이 열립니다.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가족이 있고 자녀가 있다 해도, 입으로 제아무리 사랑을 외친다 해도 사랑은 없습니다. 

이곳은 정말이지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사랑하며 살자면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방인이 되어 그 무엇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누구도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먹어치우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일도 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어디서 얻을 수도, 남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사랑이 아닌 것, 사고가 만들어낸 것을 모두 치워버렸을 때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면서 사랑이 옵니다. 사랑은 가장 긍정적인것, 가장 실용적인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비실용적인 일은 무기를 만들고 남을 주이는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금으로 낸 돈이 바로 여기에 쓰입니다. 물론 저는 정치가가 아니니 제 말을 귀담아 듣지는 마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것, 우리가 사회에 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회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름 아닌 우리가 사회를 만들었으니까요. 사랑은 그 어떤 조직과도, 그 누구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향기를 피할 수도, 함께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함께 살아간다면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 진리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길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심리적 본질과 구조 전체를 이해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심리적으로 볼 때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시계로 측정되는 물리적 시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심리적인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시간은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그렇지요? 시간은 방향성 또한 포함합니다. '무엇이다'라는 것은 서서히 변화과정을 거치는 법이고 여기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에는 정해진 방향, 이상으로 삼는 방향이 존재합니다. 이 변화를 이루려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움직임으로서의 시간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 영역에 묶인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내 모습을 되어야 하는 내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간의 움직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움직임의 방향은 사고가 만들어낸 이상과 공식, 개념 등에 따라 통제됩니다. 사고는 '나는 현재 이런모습이야. 하지만 저런 모습이 되어야 해.' 라고 말하며 이상을 만들고 그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이룹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인간의 변혁을 보는 전통적인 접근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함께 그 접근법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합니다.

 시간은 사고가 조정하는 데 따라 특정 방향을 향하는 움직입니다. 그렇지요? 이 때문에 우리는 늘 혼란 속에서 살아갑니다. 현재의 나와 되어야 하는 나라는 식의 분리 과정은 사고 자체가 분리되고 나누어져 있는 탓입니다. 사고는 국적, 종교, '너', '나' 라는 기준 등에 따라 인간을 나누고 그렇게 나누어진 우리는 갈등에 휘말립니다. 그리고 시간의 영역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합니다. 

 이런 전통 속에서 통제받아온 우리 마음이 사슬을 끊고 '무엇이 되어야 한다' 가 아닌 '무엇이다' 만을 다루게 될 수 있을까오?



슬픔과 슬픔의 끝을 이해하려면 두려움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적이거나 언어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말입니다. 사실 그 자체와 대면하여 두려움을 움켜쥐는 겁니다. 사실과 대면하면 사고는 작용을 멈춥니다. 크나큰 충격이나 위기를 맞으면 사고가 끼어들지 못하는 법이지요. 이런 점을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사고는 시간이고 또한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당면해 그것을 이해하고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깨닫고자 한다면 시간으로서의 사고, 두려움으로서의 사고를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즐거운 경험을 하면 사고는 '내일도 이런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합니다. 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제 한 즐거운 경험을 내일 다시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꿔 말하면 사고가 그 경험을 기억으로 간직했고 그 경험이 다시 반복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의 경험이 내일 반복되기를 바라지요. 어제와 내일을 만드는 것은 사고입니다. 하지만 내일은 불확실합니다. 내일은 전혀 다른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고가 아는 것은 모두 어제입니다. 따라서 사고는 늘 낡은 것이고 절대로 새롭게 되지 못합니다.

 사고, 다시 말해 경험, 지식, 쌓인 기억 등은 어제라는 시간을 만듭니다. 어제 저는 퍽 행복했습니다. 장엄한 일몰 광경을 보았거든요. 반짝이는 바닷물 위로 붉은 태양이 타올랐고 지나가는 구름은 진분홍빛을 띠었습니다. 정말 아릅답더군요. 하지만 이제 이것은 기억일 뿐입니다. 내일 다시 그곳에 가면 특별한 색도, 별다른 아름다움도 없이 해가 질지도 모릅니다. 사고가 어제니 내일이니 하는 시간을 창조한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그럼 사고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만들어낼까요? 내일 미래에는 또 하나의 끝이 찾아올 것입니다. 거리에서 그토록 자주 죽음을 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매일 우리 근처에서 어슬렁거립니다. 우리의 사고는 죽음이 미래의 일로, 아직 한참 시간이 남은 일로 여깁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간격, 그 시간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간격과 시간을 만드는 것은 우리 사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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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홀








































우연히 애니를 다시 만났어요

맨하탄의 어느곳에서였죠

다시 뉴욕에서 어떤놈과 같이 살아요

그놈을 끌고 '슬픔과 연민'을 보러 왔더군요

한가지 소득이라면

그 일 이후로 가끔 애니와 저녁을 먹으며 옛일을 회상하는거죠


내 팔을 당신몸에 두르기만 해도

전율이 느껴요

내가 당신을 처음만난

바로 그날도 그랬죠

그 옛날처럼 그렇게 느껴져요


저녁식사와 꽃다발

우린 결국 다시 헤어져야 했죠

하지만 애니를 다시 만나 기뻐요

얼마나 멋진 여자였는지

얼마나 재밌었는지 깨달았죠


옛 농담이 생각나네요

정신과 의사에게 말햇죠

"형이 미쳤어요. 자기가 닭이라고 생각해요."

의사가 이랬죠

"형을 데려오지 그래?"

"그러면 계란을 못낳잖아요"


남녀관계도 이런것 같아요

비이성적이고 광적이며 부조리해요

하지만 계속 사랑을 할거에요

우리에겐 계란이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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