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자오선

한 번 만난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야생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둘은 걸어갔지. 어느덧 갈림길에 이르자 젊은이는 마구업자에게 이렇게 멀리까지 배웅해 주어 고맙다고 말하고는 헤어져 걸어갔네. 하지만 마구업자는 친구와의 작별을 견딜 수 없었는지 소리쳐 불러서는 다시 함께 걸어갔네. 길이 점점 어두운 숲 속으로 이어지자 마구업자가 젊은이를 죽였어. 돌로 쳐 죽이고는 옷과 시계와 돈을 빼앗은 뒤 길가에 땅을 파 시신을 묻었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지. 돌아가는 길에 자기 옷을 갈기갈기 찢고 부싯돌로 상처를 내서는, 아내에게 길에서 강도를 만나 젊은 여행자는 죽고 자기만  간신히 달아났다고 말했지. 부인은 대성통곡하더니 남편에게 그곳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는, 사방에 지천으로 핀 야생 앵초꽃을 꺾어 돌무덤에 얹었어. 부인은 늙을 때까지 몇 번이고 그곳에 갔지. 마구업자는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살았지만, 다시는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았네. 그는 죽어 가며 아들에게 자신이 한 짓을 고백했지. 그러자 아들은 자기가 그런 자격이 있다면 기꺼이 아버지를 용서하겠노라고 말했고, 마구업자는 아들에게 자격이 있다고 단언하고는 죽었지. 하지만 아들은 사실 전혀 유감스럽지 않았어. 그 죽은 젊은이를 내심 질투했던 거야. 아들은 무덤에 가 돌을 헤집어 놓고 뼈를 파내 숲에다 마구 내동댕이친 다음 고향을 떠났어. 서쪽으로 가 스스로 살인마가 됐지. 늙은 여인은 그때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는 야생 짐승이 무덤을 팠나 보다고 여겼지.  뼈를 다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무덤을 복원할 수는 있었지. 여인은 돌을 쌓고 또 쌓으며, 예전처럼 꽃을 바쳤어. 여인이 아주 늙어 할머니가 되자 사람들에게 그곳이 자기 아들의 무덤이라고 말하고 다녔지. 아마도 그 무렵에는 아들도 이미 죽고 없었을 거야.


서로의 목숨을 걸고 카드 게임을 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지. 이 이야기를 다들 들어 보았겠지? 카드 한 장에 우주 전체가 걸려 있는 셈이야. 내가 저자의 손에 죽을지, 아니면 저자가 내 손에 죽을지 지금 이 순간 결판나지. 한 인간의 가치를 이보다 더 확실히 유효화할 수 있는 것이 달리 뭐가 있겠나? 궁극적 상태로의 게임의 확장은 운명이라는 개념에 관해 이론의 여지를 깡그리 없애지. 다른 인간에 대한 한 인간의 선택은 절대적이고 취소 불가능한 선호이며, 신의 섭리나 의미를 헤아리지도 않고 그런 심오한 결정을 평가하려 드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라네. 패자의 절멸이라는 판돈이 걸린 게임에서 의사 결정은 매우 명확하지. 손에 특정 패를 쥐고 있는 자는, 따라서 존재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네.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속성이야. 일단 게임에 판돈이 걸리면 권위와 정당화는 저절로 생겨나네. 보라고, 전쟁은 가장 진실한 형태의 예언이야. 더 큰 의지 안에서 한쪽의 의지와 다른 쪽의 의지를 실험하지. 사실상 그 둘을 함께 묶어 서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바로 더 큰 의지라네. 전쟁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단일화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게임이지. 전쟁은 바로 신이야.


소년은 총칼과 밧줄로 죽음을 맞는 이들을 보았고, 자신을 2달러에 판 여인이 그 2달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을 보았다. 중국 땅에서 온 배가 작은 항구에 사슬로 묶여 있고, 고양이처럼 말하는 자그마한 누런빛의 사람들이 칼로 화물을 열어젖혀 차와 비단과 향신료를 들어내는 것을 보았다. 꿍어랟는 시커먼 바다를 가파른 바위가 어르는 고독한 해변에서 드넓은 날개를 쫙 펴고 날아오르며 다른 새들을 난쟁이처럼 보이게 하는 독수리가 제비갈매기나 물떼새처럼 새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았다. 모자 하나에 다 담을 수도 없을 황금 더미가 카드 한 장에 모조리 날아가는 것을 보았고, 우리에 갇힌 곰과 사자가 야생 수소와 싸워 목숨을 잃는 것도 보았고, 샌프란시스코가 잿더미가 되어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는 것을 두차례나 지켜보았다. 말을 타고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던 소년은 하늘을 등지고 밤새 타오르는 도시와, 돌고래가 불꽃 사이로 솟아오르는 시커먼 바닷물에 드리워진 불구덩이를 보며 불길에 와락와락 뜯기는 목재의 추락과, 길 잃은 자들의 비명을 들었다. 


사건이든 의식이든 모두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일어나는 거라네. 서곡에는 어떤 결정적 사건이 포함되지. 저 커다란 곰의 죽음 같은 것 말이네. 심지어 각 사건의 정당성을 의문시하는 이들에게 조차도 오늘밤이 유별나거나 특이하게 보이지는 않을 거네. 그렇게 흘러가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지. 의식도 마찬가지야. 일부에서는 의식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고, 규모가 크고 작은 사건만이 있을 뿐이라고들 하지. 그 말이 맞다면 종교 의식 역시 특정 규모의 사건에 불과해. 종교 의식에는 반드시 피가 포함되어야 해.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된 종교 의식이라고 할 수 없지. 여기 있는 누구나 가짜 의식을 단번에 알아보지. 그렇고말고, 어린애애게 고독감을 일깨우는 것은 바로 어머니의 젖가슴이 주던 감촉이야. 모두가 사라지고 사냥감만이 그 고독한 참가자와 남게될 때도 마찬가지지. 그 고독한 사냥감은 결코 적이 아니야.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곳에서나 그렇지. 시선을 피하지 말게. 우리는 지금 외계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네. 남자라면 누구나 그 감정을 잘 알고 있지. 공허와 절망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던가? 피는 바로 그 감정이 바짝 굳지 않도록 해 주는 완화제이지 않은가? 판사가 바싹 기대었다.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누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인가? 답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가? 아니면 인간이 감히 논할 수 없는 주제인가? 죽음이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이고자 하는 걸까? 나를 보게.


운명은 끝내 피할 수 없어. 판사가 말했다.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지. 자기 운명을 알고서 일부러 반대의 길을 택한 자들도 결국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운명을 맞게 되네. 운명이란 이곳 세계만큼이나 거대하여 반항자까지도 다 품고 있거든. 너무나 많은 이들이 파멸하고 만 이곳 사막은 너무도 광대하여 우리 마음을 마구 끌어당기지만 사실상 텅 비어 있지. 황량한 불모지일 뿐이야. 사실상 거대한 돌덩어리지. 

판사가 술잔에 술을 따랐다. 마시게. 세상은 계속된다네. 우리는 밤마다 춤을 추고, 이 밤도 예외가 아니네. 굽은 길이든 곧은 길이든 다 똑같아. 우리 둘이 헤어진 후 얼마 만에 다시 만난 건가? 인간의 기억이란 불확실하고, 존재했던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와 거의 다를 바 없지. 그는 판사가 술을 따라 준 잔을 집어 들이켜고는 다시 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판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온갖 곳을 돌아다녔고, 여기도 그저 그중 하나일 뿐이오. 

판사가 눈썹을 활처럼 휘였다. 자네, 목격자라도 배치해 두었나? 자네가 그곳을 떠난 후에도 그곳이 계속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누가 알려 주던가? 

헛소리 작작 해요. 

그래? 어제는 어디 있나? 글랜턴과 브라운은 어디 있고, 신부는 어디 있나? 판사가 바싹 기대었다. 사막에서 자네가 엘리아스의 손에 내버려 둔 셸비는 어디 있나? 산에서 자네가 버리고 도망간 테이트는? 자네가 지켜 주기로 약속한 공화국의 적들을 무찔러 피칠갑을 하고서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을 때 주지사의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추었던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어디 있나? 바이올린 연주자와 무용수는? 

그야 당신이 잘 알겠죠. 

이것 하나는 알지. 전쟁이 불명예가 되고 전쟁의 고귀함이 의문시된다면 피의 신성함을 아는 명예로운 이들은 무도회에서서 쫓겨날거네. 춤이야말로 전사의 권리이기에 결국 무도회는 가짜 무도회가 되고, 춤을 추는 이도 가짜가 되는 거지. 하지만 언제나 진정한 춤을 추는 이가 한 명 정도는 있다네. 누군지 아나?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 말은 자네가 아는 것보다 더욱 진실하다네. 하지만 이 말을 해주고 싶군.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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