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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4.10 종교에 관하여

종교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신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인간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발명해 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그대는 무엇을 필요로 하든 그 필요에 합당한 종류의 신을 만들어낸다. 

그런 까닭에 신에 대한 개념이 계속 바뀌는 것이다. 나라마다 신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것도 이유가 있다. 

나라마다 필요로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신에 대해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 

개인마다 충족시켜야 하는 욕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심리적 욕구의 투영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그들의 꿈이고 희망사항이며 욕망일 뿐이지 실체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이 신을 믿는 이유는 신앙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이 위안을 주기 때문에 그들은 신을 믿는다.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얻기 위해 그들은 신을 믿는다. 이것은 그들의 꿈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도움을 준다. 

이 어둡고 불안한 세상에 신앙마저 없다면 그들은 홀로 버림받은 것 같은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신은 그들의 신일 뿐이지 실체의 신성함과 아무 상관도 없다. 



당신은 종교적이란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사원의 종소리, 또는 푸자의식, 승려들의 의식 절차, 그 밖의 온갖 제례의 넌센스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종교적이란 실재에 예민한 것이다. 

당신의 전 존재가 아름다움과 추함에 다 같이 예민한 것이다. 

말뚝에 매인 당나귀, 가난함과 도시의 더러움, 웃음과 눈물, 당신 주변의 모든 것에 날카로와지는 것이다. 

존 존재에 대한 이 예민함으로부터 선량함과 사랑이 샘솟는다. 

그리고 이 예민함 없이는 당신이 재주가 있고, 잘 차려입고, 비싼 차를 타고 다니고, 빈틈없이 깨끗하다 하더라도 아름다움이 없다.




종교적인 마음은 종교를 믿는 마음과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일 수 없으면서, 여전히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불교도일 수 있다. 

종교적인 마음은 결코 추구하지 않으며, 진리를 체험할 수도 없다. 

진리는 우리의 쾌락이나 고통에 의해, 

혹은 힌두교도나 우리가 속한 무슨 종교에 따른 우리의 조건화에 의해 떠받들여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마음이란 두려움이 없고 따라서 어떤한 믿음도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단지 있는 그대로의 그것이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현재 상태의 종교는 전혀 타당성이 없는 특수 현상이 되어있다. 

지난 2000년 동안 크리스천은 믿음을 가지게끔 조건화되었다. 

부디 당신 안을 들여다 보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다만 관찰하기만 하라,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일상을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 

크리스천으로서나 공산주의자로서나 무신론자로서 조건화된 실상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두 자기 시대의 문화에 의해, 사회에 의해, 선전이라는 특수과정에 의해 조건화되어 있다.



오늘날 세계 각 처의 종교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즐거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교회나 절간이나 사원에 다닌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슬픔, 혼란, 미움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정말 진지한 사람이라면, 실존이라고 부르는 이 무서운 것 이상의 무엇이 있는지를 정말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도그마에서, 믿음에서, 선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그는 그가 '종교인' 이 되기 위해 교육받은 구조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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