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런데 죽음이란 무엇인가? 육체적인 개체가 끝나는 것 말고, 죽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질문을 하려면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해야 한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그것은 자신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아내와 아이들과 남편과 모든 것들과의 끝없이 이어지는 힘든 싸움이며 전쟁터다. 그것은 슬프고 두렵고 불안하며 죄를 짓고 외롭고 또 절망하는 싸움이다. 그리고 이 절망 때문에 마음은 이런 저런 신이나 구세주, 성인들, 영웅숭배, 종교의식 그리고 서루 죽이는 실제의 전쟁 같은 것들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안에는 한 순간의 기쁨이나 이따금 반짝하고 눈을 빛내는 일도 있기는 하겠지만 어쟀든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또 '난 적어도 그걸 알고 있고, 그거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 ' 하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 삶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있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종말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죽음일 피할 수 없게 되면 싸워서 물리친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과 주위의 모든 것들과의 길고 지루한 필사적인 싸움이다. 우리는 이 싸움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성적으로든 다른방법으로든 만족시켜야만 하는 커져가는 쾌락이요, 쌓여가는 욕망이다. 그 모든 것이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디는 우리의 삶이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시간의 노예이다. 과거가 축적해놓은 모든 경험과 더불어 어제의 기억, 과거의 기억인 시간 말이다. 그것은 특정한 한 개인의 것인 그대의 기억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통틀어 집단, 민족, 인간의 기억이기도 하다. 과거는 인간의 개별적이며 집단적인 슬픔과 불행과 기쁨 삶 죽음 진실 사회에 맞서 싸운 그의 놀라운 투쟁들이 모여 만들어딘다. 그 모두가 과거 즉 수천겹으로 쌓인 어제이며,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현재란 미래를 향해가는 과거의 움직임일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아주 정확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없다. 현재에 의해 수정된 과거에 있었던 일은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아는 전부다. 미래는 현재의 사건들로 수정된 과거이며, 내일은 오늘의 체험과 반응과 지식으로 모습을 바꾼 어제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간은 두뇌에 의해 편집된 것이며, 두뇌는 시간 즉 수많은 어제가 쌓인 결과다. 모든 생각 하나하나가 시간의 결과다. 그것은 기억에 대한 응답이며, 어제의 바람, 좌절, 실패, 슬픔, 눈앞에 닥친 위험들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을 배경으로 해서 삶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신이 있든 없든 간에, 국가의 기능이 무엇이고 관계의 본질이 무엇이며 시기 불안 죄책감 절망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고 자신을 거기에 어떻게 적응 시키는가. 우리는 시간이라는 배경을 가지고서 이 모든 의문점들을 바라본다.

  무엇이든 그런 배경을 가지고서 바라보면 다 일그러진다. 그리고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하는 외침이 아주 클 때 과거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면, 신경질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스스로 거기에 방어벽을 세우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든 작용이다.

  우리는 영원히 과거의 관점에서 현재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과거에 있었던 일에 연속성을 주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다. 우리는 매일 삶에서 일어나는 뜻하지 않은 사건들을 과거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서 만나며, 그에 따라 미래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마음을 의식 뿐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관찰한다면, 그것이 과거라는 것, 그 속에는 새로운 게 아무것도 없고 과거와 시간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과연 이 현재가 과거와 접촉하지 않은 현재라 할 수 있는가? 미래를 제약하지 않는 현재가 있는가?


  나는 세계이고, 세계는 나다. 내 의식은 새계의 의식이다. 내 의식의 내용은 세계의 의식의 내용이다. 그 내용은 생각 즉 내 가구, 내 이름, 내 가족, 내 은행잔고, 내 신앙, 내 교리에 의해 편집되고, 그 모든 것은 내 의식 안에 있으며, 그것이 곧 세게의 의식이다. 그걸 알지 못하면 우리가 알아내고자 하는 것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하나의 물질적 작용인 그 의식에는 끝이 있다. 질병이나 사고나 뭐 그런 것들로 인해 유기체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두뇌도 퇴화하고 따라서 생각의 작용도 끝난다. 자기나 나를 편집하는 생각의 작용이 끝난다는 말이다. 그대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군. 그렇다면 내가 묻겠다. 의식은 나이며 곧 세계인데, 생각이 의식이라고 편집해 놓은 모든 것들을 지금 버리는게 가능한가? 


  그대가 죽을 때는 몸이 사그라지고 두뇌가 멈춘다. 그리고 의식 안에 있는 모든 내용이 지금처럼 계속될 수 없다. 그것이 생각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자신 그리고 그대에게 묻는다. 나는 나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대에게 묻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그대에게 묻고있다. 이 모든 이유 즉 이치를 알고 있는지, 더 나아가 이치를 뛰어넘을 수 있는지, 그대가 세계이고 세계가 그대라는 사실, 그대의 의식이 세계의 의식이라는 사실을 넘어설 수 있는지, 그대가 그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을 때 생각에 의해 편집된 모든 일들을 끝낼 수 있는지, 50년 후가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내 의식의 일부는 내가 믿는 것이다. 믿음은 내 의식의 일부이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는 세상을 바로 잡아라. 그들은 신을, 완벽한 국가를, 자신의 경험을, 예수를, 붓다를 믿는다. 믿는 것은 인간들이 흔히 하는 행위이다. 그 믿음은 생각에 의해 편집되는데, 그것이 물질적 작용이다. 그대가 죽을 때 끝내려고 생각하듯이, 그 믿음을 지금 끝낼 수 있는가? 뭔가에 대한 그대의 믿음을 즉각적으로 끝내고, "난 내 믿음을 버리는 게 두려워,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말할 수 없이 안심이 되거든." 이라고 말하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그대는 어떤 착각 속에서 안심하고 싶어하지만, 그건 전혀 안심이 아니다. 그대 그것을 지금 버릴 수 있는가? 어떤 특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를 버릴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모든 인간이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주 놀라운 현상이다. 그게 무엇이든, 고귀하든 천하든, 실제적이든 아니든, 그런건 문제가 아니다. 이상은 분명 생각에 의해 편집되며, 지금 그대로의 나에 반대되는 물질적 작용이다. 그러니 그걸 버릴 수 있는가?


  우리의 일상생활은 생각에 의해 편집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은 물질적 작용이다. 그걸 다르게 말해 보겠다. 한 인간이 자기의 슬픔과 불행과 혼란을 끝내지 않고 있다. 그때 그는 이 세상의 다른 것들과 닮아 있다. 그는 죽지만, 슬픔과 혼란과 불행은 넓디넓은 한 흐름으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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