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인간은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을 두려워 하고 신들을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이 권력과 공격을 낳습니다. 똑똑한 이들은 공포를 알지만 이를 해결할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와 교회를 통해 이 공포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공포는 사고를 통해 극복될 수 없습니다. 사고 자체가 공포를 만들기 때문이죠. 사고가 멈추었을 때에야 공포가 사라질 가능성이 열립니다.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가족이 있고 자녀가 있다 해도, 입으로 제아무리 사랑을 외친다 해도 사랑은 없습니다. 

이곳은 정말이지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사랑하며 살자면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방인이 되어 그 무엇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누구도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먹어치우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일도 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어디서 얻을 수도, 남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사랑이 아닌 것, 사고가 만들어낸 것을 모두 치워버렸을 때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면서 사랑이 옵니다. 사랑은 가장 긍정적인것, 가장 실용적인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비실용적인 일은 무기를 만들고 남을 주이는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금으로 낸 돈이 바로 여기에 쓰입니다. 물론 저는 정치가가 아니니 제 말을 귀담아 듣지는 마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것, 우리가 사회에 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회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름 아닌 우리가 사회를 만들었으니까요. 사랑은 그 어떤 조직과도, 그 누구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향기를 피할 수도, 함께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함께 살아간다면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 진리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길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심리적 본질과 구조 전체를 이해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심리적으로 볼 때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시계로 측정되는 물리적 시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심리적인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시간은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그렇지요? 시간은 방향성 또한 포함합니다. '무엇이다'라는 것은 서서히 변화과정을 거치는 법이고 여기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에는 정해진 방향, 이상으로 삼는 방향이 존재합니다. 이 변화를 이루려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움직임으로서의 시간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 영역에 묶인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내 모습을 되어야 하는 내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간의 움직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움직임의 방향은 사고가 만들어낸 이상과 공식, 개념 등에 따라 통제됩니다. 사고는 '나는 현재 이런모습이야. 하지만 저런 모습이 되어야 해.' 라고 말하며 이상을 만들고 그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이룹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인간의 변혁을 보는 전통적인 접근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함께 그 접근법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합니다.

 시간은 사고가 조정하는 데 따라 특정 방향을 향하는 움직입니다. 그렇지요? 이 때문에 우리는 늘 혼란 속에서 살아갑니다. 현재의 나와 되어야 하는 나라는 식의 분리 과정은 사고 자체가 분리되고 나누어져 있는 탓입니다. 사고는 국적, 종교, '너', '나' 라는 기준 등에 따라 인간을 나누고 그렇게 나누어진 우리는 갈등에 휘말립니다. 그리고 시간의 영역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합니다. 

 이런 전통 속에서 통제받아온 우리 마음이 사슬을 끊고 '무엇이 되어야 한다' 가 아닌 '무엇이다' 만을 다루게 될 수 있을까오?



슬픔과 슬픔의 끝을 이해하려면 두려움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적이거나 언어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말입니다. 사실 그 자체와 대면하여 두려움을 움켜쥐는 겁니다. 사실과 대면하면 사고는 작용을 멈춥니다. 크나큰 충격이나 위기를 맞으면 사고가 끼어들지 못하는 법이지요. 이런 점을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사고는 시간이고 또한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당면해 그것을 이해하고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깨닫고자 한다면 시간으로서의 사고, 두려움으로서의 사고를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즐거운 경험을 하면 사고는 '내일도 이런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합니다. 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제 한 즐거운 경험을 내일 다시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꿔 말하면 사고가 그 경험을 기억으로 간직했고 그 경험이 다시 반복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의 경험이 내일 반복되기를 바라지요. 어제와 내일을 만드는 것은 사고입니다. 하지만 내일은 불확실합니다. 내일은 전혀 다른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고가 아는 것은 모두 어제입니다. 따라서 사고는 늘 낡은 것이고 절대로 새롭게 되지 못합니다.

 사고, 다시 말해 경험, 지식, 쌓인 기억 등은 어제라는 시간을 만듭니다. 어제 저는 퍽 행복했습니다. 장엄한 일몰 광경을 보았거든요. 반짝이는 바닷물 위로 붉은 태양이 타올랐고 지나가는 구름은 진분홍빛을 띠었습니다. 정말 아릅답더군요. 하지만 이제 이것은 기억일 뿐입니다. 내일 다시 그곳에 가면 특별한 색도, 별다른 아름다움도 없이 해가 질지도 모릅니다. 사고가 어제니 내일이니 하는 시간을 창조한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그럼 사고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만들어낼까요? 내일 미래에는 또 하나의 끝이 찾아올 것입니다. 거리에서 그토록 자주 죽음을 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매일 우리 근처에서 어슬렁거립니다. 우리의 사고는 죽음이 미래의 일로, 아직 한참 시간이 남은 일로 여깁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간격, 그 시간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간격과 시간을 만드는 것은 우리 사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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