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 3월 18일 금요일


인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본다. 행복하고 온화하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은 채 소리 지르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미래는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미래는 곧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역사 속에서 수천 년간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우리는 고역과 함께 인생을 살아왔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크게 집중하지 않는다. 한두 개의 채널을 제외한 텔레비전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가벼운 오락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물론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광고를 보면서도 계속 즐거워한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 경기장의 몇몇 선수들을 지켜보며 삼사천 명의 사람들이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응원한다. 성대한 대성당에서 열리는 의식을 지켜보는 것도 오락의 한 형태다. 신성하고 종교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감정적이고 낭만적인 경험이며 독실함을 느끼게 하는 오락에 불과하다.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오락과 재미,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을 보며 과연 우리의 미래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과 똑같고, 단지 형태만 바뀌어 계속되는 것인가? 다양한 형태의 재미인 것인가?


20세기는 두 번의 지독한 전쟁과 변증법적 물질주의, 종교적 신념과 활동 그리고 의식에 대한 회의로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 역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는데 컴퓨터가 완전히 개발되고 나면 우리는 더 많은 변화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변화의 시작점에 서 있다.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고 나면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미 서서히 진행되고 있듯이 오락산업이 번창하게 되면 젊은 사람과 학생, 어린 아이들은 유흥과 하려함, 낭만적인 쾌락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그로 인해 절제와 검소라는 단어는 그들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질 것이다. 수도승과 고행자는 속세의 것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몸을 한낱 천이나 의복으로 감싸며 검소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속세에 대한 그들의 부정 역시 진정한 의미의 검소함은 아니다. 아마도 당신은 검소함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의미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즐거움을 갈망하고 오락이나 종교 또는 다른 어떤 것을 통해 자신에게서 도망가도록 길러져왔다. 게다가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기분을 반드시 표핸해야 하며 어떤 형태로든 자제하거나 표출하지 않는 것은 해롭다고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다양한 형태의 강박관념에 빠지게 되고, 당연히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도와주는 스포츠와, 오락, 유흥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늘 자신과 자신의 미래로부터 도망쳐왔다. 또한 우주와 매일매일의 일상, 삶과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쳐왔다. 하지만 자신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도망쳐서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헤맨다고 하더라도, 갈등과 기쁜, 고통, 두려움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지워버릴 수가 없다. 억누르려고 노력하고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쓸 수 있겠지만, 결국엔 이것들은 늘 수면 위로 올라 오고만다. 기쁨 역시 떨쳐버릴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기쁨 또한 똑같은 갈등과 고통 그리고 지겨움을 지니고 있다. 기쁨의 피로함과 조바심 모두 혼란스러운 인생의 일부다. 안타깝지만 벗어날 수 없다. 생각과 나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 신중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히자 않는 한 이런 깊은 혼란에서 도망칠 수 없다.



'주워온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83 10월 4일  (0) 2014.03.03
날개  (0) 2014.03.01
사랑과 섹스에 관한 단상  (0) 2014.01.22
삶과 죽음에 대하여  (1) 2013.11.03
이런저런  (0) 2013.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