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코스키


글 속 언어는 그 사람의 사는 곳과 사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난 평생을 백수에 일용직 노동자로 살았다.
박식한 대화는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내 삶은 상류층과 교류가 생기려야 생길수가 없다.
난 똥구덩이에 앉아 있다.
좀 화가 났고 그건 이상한 광기였는데 내가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이다.
난 마음을 홀로 다스리고 삼켜야 했다.
본능을 괴롭히고 편견을 키웠다.
고독은 가장 큰 무기다.
현실을 과장하려면 고독이 필요하다.
난 여가에 진정한 가치를 둔다.
그게 내가 찾은 방식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곧 성스러운 장소다.
한 도시에서 버려진 무덤을 찾았고
정오에 술에 취한 채 거기서 잠을 잤다.
다른 도시에서는 더럽고 냄새나는 운하를 쳐다보며
몇 시간이고 앉아 멍을 때렸다.
홀로 보낼 몇 시간, 며칠, 몇 주, 몇 년이 필요했다.
굶주리며 지낼 작은 방도 찾았다.
난 적은 돈으로 오래 버티는 재주가 있다.
모든 걸 시간을 위해 희생했고 주류에서 벗어났다.
하루에 초콜릿 바 하나가 식사의 전부일 때가 많았다.
가장 크게 돈을 쓰는 건 싸구려 와인을 살 때다.
담배를 직접 말아 피웠으며 단편을 수백 편 쓰고
대부분을 잉크로 직접 인쇄했다.
타자기를 저당 잡힌 적이 많았다.
인간을 관찰하려고 바에 앉아 술을 마셨다.
대략 183센티미터 키에 61킬로그램이 나갔고
술에 절었다.
난 태생이 마른 남자인데 머리는 컸다.
난 절망적이지 않다.
내 가난이 즐거웠다.
굶는 건 처음 2~3일만 힘들 뿐이었다.
그 후부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계단을 둥둥 떠서 내려오고 햇살은 매우 밝게 비치고 소리는 아주 크게 들린다.
통찰력이 흐려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진다.
휴일이나 전 세계 축제는 의미가 없어진다.
내 상태가 어떤지 확신할 수 없지만 아무튼 꽤 건강하다.
외로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된 문제는 치아다.
엄청난 치통의 공격을 받았다.
얼른 와인을 입에 밀어 넣고 방 안을 걸었다.
이가 헐거워져 손가락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가끔 손바닥으로 이가 빠져나오기도 했다.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도서관에서 문학 잡지를 읽고 최고의 글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보며 당혹감을 느꼈다.
번지르르한 말이 흐를 뿐 속은 텅 비었다.
도박도 빚도 즐거움도 없다.
과거의유명한 작품인 고전을 읽었다.
최소 수백년이 지났는데도 온갖 거짓말, 치장, 과장, 사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뭘 하는지 몰랐지만 그렇게 했다.

가고자 하는 곳에 더 치중하고
내게는 신과도 같은 단순함에 몰두했다.

여유가 없고 적게 가질수록 실수나 잘못을 범할 기회가 줄어든다.
천재는 단순한 방식으로 완전한 걸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계속 잘 읽히는 문장을 쓰려고 했다.

내 글이 받아들여진 적은 매우 드물었다.
편집자들은 대체로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특히나 손으로 인쇄한 긴 원고를 받으면 그렇게 느낀다.
한 편집자의 답신을 기억한다.
"대체 이건 뭐죠?"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난 내 방식대로 미쳤다.
커튼을 전부 내리고 일주일간 침대에서 꼼짝도 안 한 적이 많다.
한번은 이런 소리를 들었다.
"헬렌, 3호실에 사는 남자 알아? 그의 쓰레기통에는 와인병만 들어있어. 그리고 어두운 방에서 음악을 들어. 난 저 사람이 여길 나가게 만들거야."
여자, 자동차 뭐 그런 것들 그리고 TV는 내게 이상한 외부 요소일 뿐이다.
간간이 아주 간간이 여자들이 있었지만 괜찮은 여자는 거의 없었다.
"집에 TV가 없는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왜 그래 자기 헛소리 그만 하고 다리 좀 보여 줘봐"
좁아터진 방, 공원 벤치, 최악의 직업 최악의 여자들과 수십년을 산 뒤에 마침내 내 글의 일부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찾는 곳은 소규모 잡지나 포르노 잡지였다.
포르노 잡지가 좋은 방출구가 되었다. 원하는 걸 더 직접적으로 더 좋게 말할 수 있으니까.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드러낸 여자 사진 사이에서 마침내 단순함과 자유를 얻었다.
이윽고 난 더 정진해서 한층 존경할 만한 출판사를 공략했다.
책을 몇 권 출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문제, 내 방식을 고수했다고 생각한다.
문장 속 들쑥날쑥한 돌덩이, 비꼬는 웃음, 트림, 방귀를 좋아한다.
여전히 사람에게 공격적이지만 사람을 공격하는 글은 쓰지 않는다.
그건 너무 쉬우니까
장모는 나보다 겨우 열 살이 많은데 지난해 날 찾아왔다.
어느 날 저녁 경마장에서 돌아와 보니 장모가 내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엄마한테 줬어요 아내가 말했다.
뭣하려? 내가 물었다.
장모는 스크래블과 십자말풀이를 좋아하고 즐겨 보는 tV프로그램이 제시카의 추리극장 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우린 장모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난 아내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내 책에 대해 뭐라고 했어?"
아내는 좋은 연기자다. 씩씩거리는 모욕까지 목소리에 담을 수 있다.
"네 남편은 왜 저런 말을 써야 했니?"
대부분은 대화를 말한 것이겠지만 난 그사이 문장이 거슬렸다는 걸 확신했다.
뻣뻣하고 갈라지고 흐물거리고 새까만, 셰익스피어와는 거리거 머니까.
난 눅눅한 굴에 들어앉아 그런 글을 쓰려고 성실하게 노력했다.
장모가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나니 날 증명한 것 같았다.
장모의 인정을 받으려면 작품은 내게 두려운 것이어야 하고,
그건 내가 무뎌져서 실용주의자들의 방식으로 갔다는 징조다.

'주워온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그  (0) 2022.05.04
1  (0) 2019.01.04
12. 28  (0) 2017.12.28
안녕, 용문객잔  (0) 2017.11.19
woman ochre  (0) 2017.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