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더러운 거미줄을 걷어 내자는 것이 아니고, 거미줄보다 더 더러운 게 호화판 교회 장식품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다 하느님을 모신다고 해도 좋고, 예배당을 거룩한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라 해도 좋습니다.
하느님이나 성도가 모두 거룩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룩하기 때문에 화려한 장식을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만약에 하느님을 그렇게 화려하게 모시고 싶고, 성도들의 사치한 예배당이 필요하다면
이 세상 어디에나 똑같이 화려하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수인들이 갇혀 있는 캄캄한 지하 감옥에도 계시고,
기계 소리가 요란한 공장 일터에도 계시고,
창녀들이 몸을 파는 어두운 뒷골목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갈보리 산 언덕에서 죽은 예수는 진실로 정치와 대결했던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의 모든 정치를 부정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정치를 비판하다 보니 왕의 미움을 샀고, 사제들의 미움을 샀고, 로마의 앞잡이들에게 미움을 산 것입니다.
작년 겨울 어느 날, 보석상 강도범으로 9년형을 받고 징역을 살다 나왔다는 불쌍한 전과범을,
꾸지람만 실컷 하고는 내쫓듯이 보내 놓고 아직도 마음만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지금 같은 세상에 저 자신이 끔직한 그런 전과자라 해도 이다지 부끄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큰 도둑은 다른 데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그런 좀도둑만이 정죄받는 세상이고
저도 역시 그 큰 도둑놈의 한패거리니 말입니다.
제가 여지껏 감옥에 가지 못한 것은 누군가 제 대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녁 예배 시간이 되어 우리는 예배당으로 갔다.
석조 건물의 예배당은 꽤나 넓었다. 몇천 명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을 새워 기도를 하면서 예배당 마루에서 지냈다.
다음 날 아침엔 기도원 내에 있는 매점에서 고구마를 사서 먹었다.
날고구마를 그대로 문둥이 청년과 함께 씹어 먹고는 산비탈 소나무 밑에서 잤다.
3일째 되던 날, 문둥이 청년은 더 있을 수 없다면서 기도원을 떠나갔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청년은 주저주저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꽉 마주잡고 산 밑까지 전송을 했다.
그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가는 뒷모습이 산모퉁이로 사라져 버리자 나는 여태까지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그 뒤 일주일 동안 기도원에 있었지만, 잠시도 그 문둥이 청년의 모습이 눈 앞에서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차라리 그 청년과 함께 어디든 함께 갔더라면 하는 뉘우침까지 일어나는 것이었다.
길 잃은 양처럼 떠나간 청년을 생각하니 이 넓은 기도원엔 예수님이 안 계신 것 같았다.
분명히 문둥이 청년을 따라가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수중에 남았던 60원으로 길가 상점에서 두레박용 깡통 하나와 성냥 한 갑을 샀다.
문둥이 청년이 불현듯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목발을 짚은 청년을 찾으면서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