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 3월 18일 금요일


인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본다. 행복하고 온화하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은 채 소리 지르며 뛰어노는 아이들의 미래는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미래는 곧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역사 속에서 수천 년간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우리는 고역과 함께 인생을 살아왔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크게 집중하지 않는다. 한두 개의 채널을 제외한 텔레비전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가벼운 오락 프로그램을 방송한다. 물론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광고를 보면서도 계속 즐거워한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스포츠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 경기장의 몇몇 선수들을 지켜보며 삼사천 명의 사람들이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응원한다. 성대한 대성당에서 열리는 의식을 지켜보는 것도 오락의 한 형태다. 신성하고 종교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감정적이고 낭만적인 경험이며 독실함을 느끼게 하는 오락에 불과하다.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오락과 재미,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을 보며 과연 우리의 미래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과 똑같고, 단지 형태만 바뀌어 계속되는 것인가? 다양한 형태의 재미인 것인가?


20세기는 두 번의 지독한 전쟁과 변증법적 물질주의, 종교적 신념과 활동 그리고 의식에 대한 회의로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 역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는데 컴퓨터가 완전히 개발되고 나면 우리는 더 많은 변화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변화의 시작점에 서 있다.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고 나면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미 서서히 진행되고 있듯이 오락산업이 번창하게 되면 젊은 사람과 학생, 어린 아이들은 유흥과 하려함, 낭만적인 쾌락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그로 인해 절제와 검소라는 단어는 그들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질 것이다. 수도승과 고행자는 속세의 것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몸을 한낱 천이나 의복으로 감싸며 검소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속세에 대한 그들의 부정 역시 진정한 의미의 검소함은 아니다. 아마도 당신은 검소함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의미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즐거움을 갈망하고 오락이나 종교 또는 다른 어떤 것을 통해 자신에게서 도망가도록 길러져왔다. 게다가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기분을 반드시 표핸해야 하며 어떤 형태로든 자제하거나 표출하지 않는 것은 해롭다고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다양한 형태의 강박관념에 빠지게 되고, 당연히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도와주는 스포츠와, 오락, 유흥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늘 자신과 자신의 미래로부터 도망쳐왔다. 또한 우주와 매일매일의 일상, 삶과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쳐왔다. 하지만 자신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도망쳐서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헤맨다고 하더라도, 갈등과 기쁜, 고통, 두려움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지워버릴 수가 없다. 억누르려고 노력하고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쓸 수 있겠지만, 결국엔 이것들은 늘 수면 위로 올라 오고만다. 기쁨 역시 떨쳐버릴 수 없는 요소 중 하나다. 기쁨 또한 똑같은 갈등과 고통 그리고 지겨움을 지니고 있다. 기쁨의 피로함과 조바심 모두 혼란스러운 인생의 일부다. 안타깝지만 벗어날 수 없다. 생각과 나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 신중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히자 않는 한 이런 깊은 혼란에서 도망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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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당신은 아주 젊다. 당신의 천진함과 그 때문에 상처받기 쉬운 감수성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고 가져야만 하는 유일한 보배다. 


사람은 짐 없이 아무런 노력없이 즐겁게 여행해야 한다. 

그 어떠한 성소나 기념비, 사회적 종교적 영웅에도 한눈팔지 않고, 아름다움과 사랑을 간직한 채 홀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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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섹스에 관한 단상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두 가지 문제는 사랑과 섹스이다. 사랑은 추상적인 관념이고 섹스는 실제 생활의 육체적 충동이다. 이것은 분명 존재하며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를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실제 있는 그대로 알아보자. 

과연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사고가 쾌락으로써 배양한 관능적 기쁨인가, 아니면 크나큰 기쁨이나 정적인 즐거움을 주었던 경험을 상기하는 것인가? 

석양의 아름다움, 당신이 만지거나 보는 가녀린 잎새, 혹은 당신이 냄새맡는 꽃향기가 사랑일까? 

사랑은 쾌락인가, 아니면 욕망인가? 혹은 이 둘 다인가? 

사랑은 신성한 것과 비천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사고가 결코 깨트릴 수 없는 분리 불가능한 전체인가? 

사랑은 대상 없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대상이 있을 때만 생기는가? 

당신이 한 여인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사랑이 당신 안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랑은 사고가 지속성을 부여하는 감각, 욕망, 쾌락인가? 아니면 사랑은 다정함처럼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당신 안의 어떤 상태인가? 

사랑은 대상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사고가 배양한 어떤 것인가, 아니면 사고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라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것인가? 

사랑이란 낱말과 그 배후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섹스에 관한 번뇌에 시달리거나 노이로제 상태가 되며, 나아가 섹스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사랑은 사고에 의해 조각나서는 안 된다. 사고가 사랑을 조각내버릴 때, 그때는 더는 사랑이 아닌 전혀 이질적인 것, 즉 기억, 프로파간다, 위안, 편리함의 산물이 되고 만다.

섹스는 사고의 산물일까? 

섹스 안엔 쾌락, 기쁨, 우애, 정다움이 들어 있는데 이런 것은 사고에 의해 강화되어 떠오르는 감정일까? 

성적인 행위 속엔 자기망각, 자기포기, 두려움과 근심, 걱정들이 사라지는 감각이 있다. 이러한 다정함과 자기포기 상태를 기억하고 되풀이하기를 바라면서, 말하자면 다음 기회가 올 때까지 되씹고 있다. 이런 것이 다정함인가, 아니면 이미 끝나버렸지만 반복을 통해 다시 붙잡고 싶어서 단순히 회상하는 것인가?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도 반복하는 것은 파괴적인 과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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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선생님, 당신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고 없이 어떻게 사고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사고는 바로 나의 존재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그 존재, 사고가 낳은 그 존재가 끝장이 나야 합니다.

자기중심성 자체가 그 활동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저절로 죽어야 합니다.

새로운 종교적 삶의 시작은 바로 이 죽음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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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웃고 떠들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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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

삶 행위에는 패턴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혹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마음이 하기에 가장 손쉬운 것은 다른 누군가가 말한 걸 그대로 따르는 겁니다. 그때 추종자는 권위를 자기가 원하는 것 혹은 특정한 체계의 철학이나 관념화를 통해 약속된 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사람은 특정한 체계의 철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르고 그것에 매달리고 거기에 의존하며 얻어 들어서 아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죄다 이런 중고품 같은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그림 그리기나 시 쓰기에 관해 자기가 원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추종하고 모방하고 순응하도록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중고품 같은 인간, 부조리한 인간이 되는 거지요. 그것이 권위가 가진 파괴적인 특성입니다.

내적으로 정신적으로 한 인간으로서 여러분은 추종합니까? 그렇게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본질적으로 낡아빠진 중고인간, 무가치한 인간입니다. 좋은 일을 하고, 멋진 삶을 영위하고, 아름다운 집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비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린 어릴 때부터 그렇게 조건화되어 있습니다. '네 형처럼 되어야 해', 아니면 고모처럼 되거나, 성자처럼 되어야 하거나 아니면 마오나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따릅니다. 우린 언제나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교육입니다. 점수 매겨서 시험에 합격시키는 것이요. 비교하지 않고 경험하지 않고 산다는 게, 따라서 비공격적으로 비폭력적으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여러분은 모릅니다.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 그건 공격의 한 형태이며, 따라서 그건 폭력의 한 형태입니다.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거나 때리는 것만 폭력은 아닙니다. 이렇게 비교하는 정신도 폭력입니다. 비교와 순응은 함께 가며, 억제와 갈등 그리고 끝없는 아픔만 낳습니다.

자유로운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 분명하고 깊이 있게 그리고 진지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이 되고, 내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건, 무엇인가에, 어떤 사람에게, 즉 친구나, 남편이나 아내에게 또는 어떤 사상, 권위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고 풀리지 않는 삶의 모든 문제들을 생각해보기 전에, 마음이 내적으로 모든 권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걸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뿌리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안을 얻고 싶어 여러분에게 의존한다면, 내가 갖고 있는 외로움, 추함, 어리석음과 얄팍하고 보잘것없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허풍떠는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분에게 의존한다면, 여러분에게 의존하는 바로 그것이 두려움을 낳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자기만의 상상, 공상, 경험, 지식에 의존하면 그것이 자유를 파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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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이런 건 모두 부질없는 것이야, 그저 지껄여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아. 

그보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어머니는 거의 빈털터리요. 누의동생은 어떻게 하다보니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가정교사 자리라도 찾아보려고 헤매다녔지. 두 사람의 모든 희망은 나에게만 쏠린 셈이오. 

나는 공부를 했지. 그런데 학자금을 끝내 댈 수가 없어 한때 휴학해야만 했소. 하기야 그런 상황이 계속되었더라면 10년이나 20년 뒤에 사태가 호전된다는 걸 전제로 한 이야기지만, 나는 기껏해야 선생이나 관리가 되어서 연봉 1천 루블 정도 받을 희망도 있었지..

하기야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요. 이미 훨씬 오래 전부터 거짓말을 하고 있었지. 

지금 것은 모두가 엉터리요. 당신이 말한 대로야. 원인은 전혀 다른 거요. 

그런게 아니라 이렇게 생각해줘 나는 교만하고 질투가 심하고 심술궃고 비열하고 집념이 강하고 게다가 아마도 발광증세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차라리 그 모두를 합쳐 생각하는게 좋소 어차피 그전부터 발광증세가 있다고 들어왔고, 나도 알고 있었거든! 

나는 아까 대학 다닐 학자금을 댈 수 없었다고 말했지. 하지만 어쩌면 댈 수 있었을지도 모르오. 학교에 납부할 정도의 돈은 어머니가 보내 주셨을 테고, 구두며 옷이며 빵을 살 돈은 내가 벌 수 있었거든. 정말이오. 가정교사 자리도 있었고  

그런데 나는 심술이 나서 일하려 하지 않았던 거요. 

그렇지, 심술이 난 거야 이게 꼭 맞는 말이로군 

그래서 나는 개미처럼 내 보금자리에 틀어박혀 버렸소 

당신은 내 방에 온 적이 있으니 봤겠지 그런데 소냐, 낮은 천장이라든가 비좁은 방은 마음이나 머리를 짓눌러 버리게 마련이오. 

아아 그 골방구석을 내가 얼마나 증오했는지 당신은 모를거요.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곳을 빠져나올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 일부러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어. 며칠이고 거기서 나오려고도 하지 않고 일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먹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기만 했던 거요. 나스타샤가 먹을 것을 갖다 주면 먹고, 갖다 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굶은 채 심사가 뒤틀려 부탁하지도 않았지. 밤에는 불도 없는 컴컴한 방에서 그냥 잤소. 초 값을 버는 것도 귀찮았으니까. 공부를 해야만 하는데도 책을 팔아 버렸고, 책상 위의 노트나 수첩에는 지금 먼지가 1인치나 쌓여 있소. 

나는 벌렁 누운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좋았어. 줄곧 생각만 하고 있었지. 더구나 늘 꿈을 꾸는 거야. 여러 가지 이상스러운 꿈이었어.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그런 꿈이었지. 그런데 그때부터 머리에 아른거리기 시작한 게 있었어. 

아니 그런 게 아냐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군. 사실은 말이야 그 무렾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물어 보곤 했소. 

어째서 나는 이처럼 바보일까? 

다른 친구들이 바보이고 그 친구들이 바보임을 내가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나는 조금도 영리해지려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오. 

나중에야 알았지만 소냐 모두가 영리해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일이더군. 그리고 이런 것도 알게 되었소. 즉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인간이란 함부로 변하는 것이 아니며 또 인간들을 개조할 사람이 나타날 그런 기색도 없다. 도대체 그런 일에 애를 쓰면 그 만큼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말이오. 아니 정말 그래 이건 녀석들의 법칙이거든 법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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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런데 죽음이란 무엇인가? 육체적인 개체가 끝나는 것 말고, 죽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질문을 하려면 살아있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해야 한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그것은 자신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웃들과 아내와 아이들과 남편과 모든 것들과의 끝없이 이어지는 힘든 싸움이며 전쟁터다. 그것은 슬프고 두렵고 불안하며 죄를 짓고 외롭고 또 절망하는 싸움이다. 그리고 이 절망 때문에 마음은 이런 저런 신이나 구세주, 성인들, 영웅숭배, 종교의식 그리고 서루 죽이는 실제의 전쟁 같은 것들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안에는 한 순간의 기쁨이나 이따금 반짝하고 눈을 빛내는 일도 있기는 하겠지만 어쟀든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또 '난 적어도 그걸 알고 있고, 그거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 ' 하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 삶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있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종말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죽음일 피할 수 없게 되면 싸워서 물리친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과 주위의 모든 것들과의 길고 지루한 필사적인 싸움이다. 우리는 이 싸움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성적으로든 다른방법으로든 만족시켜야만 하는 커져가는 쾌락이요, 쌓여가는 욕망이다. 그 모든 것이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디는 우리의 삶이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시간의 노예이다. 과거가 축적해놓은 모든 경험과 더불어 어제의 기억, 과거의 기억인 시간 말이다. 그것은 특정한 한 개인의 것인 그대의 기억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를 통틀어 집단, 민족, 인간의 기억이기도 하다. 과거는 인간의 개별적이며 집단적인 슬픔과 불행과 기쁨 삶 죽음 진실 사회에 맞서 싸운 그의 놀라운 투쟁들이 모여 만들어딘다. 그 모두가 과거 즉 수천겹으로 쌓인 어제이며,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현재란 미래를 향해가는 과거의 움직임일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아주 정확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없다. 현재에 의해 수정된 과거에 있었던 일은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아는 전부다. 미래는 현재의 사건들로 수정된 과거이며, 내일은 오늘의 체험과 반응과 지식으로 모습을 바꾼 어제다. 이것이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간은 두뇌에 의해 편집된 것이며, 두뇌는 시간 즉 수많은 어제가 쌓인 결과다. 모든 생각 하나하나가 시간의 결과다. 그것은 기억에 대한 응답이며, 어제의 바람, 좌절, 실패, 슬픔, 눈앞에 닥친 위험들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을 배경으로 해서 삶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신이 있든 없든 간에, 국가의 기능이 무엇이고 관계의 본질이 무엇이며 시기 불안 죄책감 절망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고 자신을 거기에 어떻게 적응 시키는가. 우리는 시간이라는 배경을 가지고서 이 모든 의문점들을 바라본다.

  무엇이든 그런 배경을 가지고서 바라보면 다 일그러진다. 그리고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하는 외침이 아주 클 때 과거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면, 신경질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스스로 거기에 방어벽을 세우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든 작용이다.

  우리는 영원히 과거의 관점에서 현재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과거에 있었던 일에 연속성을 주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다. 우리는 매일 삶에서 일어나는 뜻하지 않은 사건들을 과거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서 만나며, 그에 따라 미래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마음을 의식 뿐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관찰한다면, 그것이 과거라는 것, 그 속에는 새로운 게 아무것도 없고 과거와 시간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과연 이 현재가 과거와 접촉하지 않은 현재라 할 수 있는가? 미래를 제약하지 않는 현재가 있는가?


  나는 세계이고, 세계는 나다. 내 의식은 새계의 의식이다. 내 의식의 내용은 세계의 의식의 내용이다. 그 내용은 생각 즉 내 가구, 내 이름, 내 가족, 내 은행잔고, 내 신앙, 내 교리에 의해 편집되고, 그 모든 것은 내 의식 안에 있으며, 그것이 곧 세게의 의식이다. 그걸 알지 못하면 우리가 알아내고자 하는 것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하나의 물질적 작용인 그 의식에는 끝이 있다. 질병이나 사고나 뭐 그런 것들로 인해 유기체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두뇌도 퇴화하고 따라서 생각의 작용도 끝난다. 자기나 나를 편집하는 생각의 작용이 끝난다는 말이다. 그대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군. 그렇다면 내가 묻겠다. 의식은 나이며 곧 세계인데, 생각이 의식이라고 편집해 놓은 모든 것들을 지금 버리는게 가능한가? 


  그대가 죽을 때는 몸이 사그라지고 두뇌가 멈춘다. 그리고 의식 안에 있는 모든 내용이 지금처럼 계속될 수 없다. 그것이 생각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자신 그리고 그대에게 묻는다. 나는 나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대에게 묻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그대에게 묻고있다. 이 모든 이유 즉 이치를 알고 있는지, 더 나아가 이치를 뛰어넘을 수 있는지, 그대가 세계이고 세계가 그대라는 사실, 그대의 의식이 세계의 의식이라는 사실을 넘어설 수 있는지, 그대가 그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을 때 생각에 의해 편집된 모든 일들을 끝낼 수 있는지, 50년 후가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내 의식의 일부는 내가 믿는 것이다. 믿음은 내 의식의 일부이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는 세상을 바로 잡아라. 그들은 신을, 완벽한 국가를, 자신의 경험을, 예수를, 붓다를 믿는다. 믿는 것은 인간들이 흔히 하는 행위이다. 그 믿음은 생각에 의해 편집되는데, 그것이 물질적 작용이다. 그대가 죽을 때 끝내려고 생각하듯이, 그 믿음을 지금 끝낼 수 있는가? 뭔가에 대한 그대의 믿음을 즉각적으로 끝내고, "난 내 믿음을 버리는 게 두려워,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말할 수 없이 안심이 되거든." 이라고 말하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그대는 어떤 착각 속에서 안심하고 싶어하지만, 그건 전혀 안심이 아니다. 그대 그것을 지금 버릴 수 있는가? 어떤 특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를 버릴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모든 인간이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주 놀라운 현상이다. 그게 무엇이든, 고귀하든 천하든, 실제적이든 아니든, 그런건 문제가 아니다. 이상은 분명 생각에 의해 편집되며, 지금 그대로의 나에 반대되는 물질적 작용이다. 그러니 그걸 버릴 수 있는가?


  우리의 일상생활은 생각에 의해 편집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은 물질적 작용이다. 그걸 다르게 말해 보겠다. 한 인간이 자기의 슬픔과 불행과 혼란을 끝내지 않고 있다. 그때 그는 이 세상의 다른 것들과 닮아 있다. 그는 죽지만, 슬픔과 혼란과 불행은 넓디넓은 한 흐름으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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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시간들이 지나간다.

시간은 때로는 열망을 절망으로, 꿈을 현실로 타락시킨다.

별을 따라 갔다고 믿었던 내 여행은 황량하고도 또 거대한 사막에 이르렀고

폐속 깊숙히 침투한 모래바람이 격한 기침과, 갈데없는 적막함만을 내게 남겨주었다.

위대하다 믿었던 책도, 정교하다 믿었던 나침반도, 영원할 것 같이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도

더이상 아무런 이정표가 되어주지 못한다. 

사막에는 오직 모래와 바람뿐이고, 

사막은 내 걸음을 따라 영원히 번식해 나간다.

이제는 책을 읽는 법, 별을 보는 법, 살아남는법 

그동안 내가 배우고 또 익혀왔던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

살아남자면 이제 

폐속의 모래가 담긴 피를 토하는 법

모래에 머리를 처박고 꼬꾸라져 죽어가는 법, 

그리고 바스라진 모래가 되어 이 거친 바람속에서 흩날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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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인간은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을 두려워 하고 신들을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이 권력과 공격을 낳습니다. 똑똑한 이들은 공포를 알지만 이를 해결할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와 교회를 통해 이 공포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공포는 사고를 통해 극복될 수 없습니다. 사고 자체가 공포를 만들기 때문이죠. 사고가 멈추었을 때에야 공포가 사라질 가능성이 열립니다.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가족이 있고 자녀가 있다 해도, 입으로 제아무리 사랑을 외친다 해도 사랑은 없습니다. 

이곳은 정말이지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사랑하며 살자면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방인이 되어 그 무엇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누구도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먹어치우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일도 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어디서 얻을 수도, 남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사랑이 아닌 것, 사고가 만들어낸 것을 모두 치워버렸을 때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면서 사랑이 옵니다. 사랑은 가장 긍정적인것, 가장 실용적인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비실용적인 일은 무기를 만들고 남을 주이는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금으로 낸 돈이 바로 여기에 쓰입니다. 물론 저는 정치가가 아니니 제 말을 귀담아 듣지는 마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것, 우리가 사회에 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회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름 아닌 우리가 사회를 만들었으니까요. 사랑은 그 어떤 조직과도, 그 누구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향기를 피할 수도, 함께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함께 살아간다면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 진리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길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심리적 본질과 구조 전체를 이해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심리적으로 볼 때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시계로 측정되는 물리적 시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심리적인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시간은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그렇지요? 시간은 방향성 또한 포함합니다. '무엇이다'라는 것은 서서히 변화과정을 거치는 법이고 여기에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에는 정해진 방향, 이상으로 삼는 방향이 존재합니다. 이 변화를 이루려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움직임으로서의 시간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 영역에 묶인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내 모습을 되어야 하는 내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간의 움직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움직임의 방향은 사고가 만들어낸 이상과 공식, 개념 등에 따라 통제됩니다. 사고는 '나는 현재 이런모습이야. 하지만 저런 모습이 되어야 해.' 라고 말하며 이상을 만들고 그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이룹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인간의 변혁을 보는 전통적인 접근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함께 그 접근법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합니다.

 시간은 사고가 조정하는 데 따라 특정 방향을 향하는 움직입니다. 그렇지요? 이 때문에 우리는 늘 혼란 속에서 살아갑니다. 현재의 나와 되어야 하는 나라는 식의 분리 과정은 사고 자체가 분리되고 나누어져 있는 탓입니다. 사고는 국적, 종교, '너', '나' 라는 기준 등에 따라 인간을 나누고 그렇게 나누어진 우리는 갈등에 휘말립니다. 그리고 시간의 영역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합니다. 

 이런 전통 속에서 통제받아온 우리 마음이 사슬을 끊고 '무엇이 되어야 한다' 가 아닌 '무엇이다' 만을 다루게 될 수 있을까오?



슬픔과 슬픔의 끝을 이해하려면 두려움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적이거나 언어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말입니다. 사실 그 자체와 대면하여 두려움을 움켜쥐는 겁니다. 사실과 대면하면 사고는 작용을 멈춥니다. 크나큰 충격이나 위기를 맞으면 사고가 끼어들지 못하는 법이지요. 이런 점을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입니다. 사고는 시간이고 또한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당면해 그것을 이해하고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깨닫고자 한다면 시간으로서의 사고, 두려움으로서의 사고를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즐거운 경험을 하면 사고는 '내일도 이런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합니다. 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제 한 즐거운 경험을 내일 다시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꿔 말하면 사고가 그 경험을 기억으로 간직했고 그 경험이 다시 반복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의 경험이 내일 반복되기를 바라지요. 어제와 내일을 만드는 것은 사고입니다. 하지만 내일은 불확실합니다. 내일은 전혀 다른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고가 아는 것은 모두 어제입니다. 따라서 사고는 늘 낡은 것이고 절대로 새롭게 되지 못합니다.

 사고, 다시 말해 경험, 지식, 쌓인 기억 등은 어제라는 시간을 만듭니다. 어제 저는 퍽 행복했습니다. 장엄한 일몰 광경을 보았거든요. 반짝이는 바닷물 위로 붉은 태양이 타올랐고 지나가는 구름은 진분홍빛을 띠었습니다. 정말 아릅답더군요. 하지만 이제 이것은 기억일 뿐입니다. 내일 다시 그곳에 가면 특별한 색도, 별다른 아름다움도 없이 해가 질지도 모릅니다. 사고가 어제니 내일이니 하는 시간을 창조한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그럼 사고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만들어낼까요? 내일 미래에는 또 하나의 끝이 찾아올 것입니다. 거리에서 그토록 자주 죽음을 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은 매일 우리 근처에서 어슬렁거립니다. 우리의 사고는 죽음이 미래의 일로, 아직 한참 시간이 남은 일로 여깁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간격, 그 시간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 간격과 시간을 만드는 것은 우리 사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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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홀








































우연히 애니를 다시 만났어요

맨하탄의 어느곳에서였죠

다시 뉴욕에서 어떤놈과 같이 살아요

그놈을 끌고 '슬픔과 연민'을 보러 왔더군요

한가지 소득이라면

그 일 이후로 가끔 애니와 저녁을 먹으며 옛일을 회상하는거죠


내 팔을 당신몸에 두르기만 해도

전율이 느껴요

내가 당신을 처음만난

바로 그날도 그랬죠

그 옛날처럼 그렇게 느껴져요


저녁식사와 꽃다발

우린 결국 다시 헤어져야 했죠

하지만 애니를 다시 만나 기뻐요

얼마나 멋진 여자였는지

얼마나 재밌었는지 깨달았죠


옛 농담이 생각나네요

정신과 의사에게 말햇죠

"형이 미쳤어요. 자기가 닭이라고 생각해요."

의사가 이랬죠

"형을 데려오지 그래?"

"그러면 계란을 못낳잖아요"


남녀관계도 이런것 같아요

비이성적이고 광적이며 부조리해요

하지만 계속 사랑을 할거에요

우리에겐 계란이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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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오월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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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관하여..


정부가 당신의 나라 사랑을 위해서 가서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까? 

종교는 신의 사랑을 위해서 섹스롤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까? 

사랑은 욕망입니까?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들 대부분에게 사랑은 즐거움을 동반하는 욕망으로서, 즐거움은 감각들을 통해서, 

성적인 애착과 성취를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섹스에 반대하지 않지만, 그 속에 무엇이 함유되어있는지 압니다. 

성생활이 여러분에게 순간적으로 주는 것은 자신의 완전한 버림입니다. 

그러고 나서 혼란을 가진 상태로 다시 돌아옵니다. 

러분은 걱정이 없고, 문제가 없고, 자기가 없는 그 상태를 거듭 반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랑 속에는 성적인 즐거움, 아이들을 돌보고 요리하는 누군가를 집안에 두는 즐거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그녀에게 의존합니다. 

그녀는 그녀의 몸, 그녀의 감정, 그녀의 격려, 일정한 안정과 느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녀가 지루해지거나 다른 사람과 도망가 버리면 당신의 정서적인 균형이 온통 깨지게 되고,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이런 교란상태를 질투라고 부릅니다. 

그 속에는 고통이 있고, 불안, 혐오 그리고 폭력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네가 나에게 속하고 있는 한 너는 나를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는 순간 나는 너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내가 성적인 또는 다른 내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너에게 기댈 수 있는 한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내가 바라는 바를 네가 공급하기를 그치는 순간 나는 너를 좋아하고 싶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고, 즉 과거의 산물이 아닙니다. 

사고는 아마 사랑을 배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

랑은 질투로 감싸거나 붙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질투는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항상 활동적이고 현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사랑할 것이다." 라거나 "나는 사랑했었다."라고 말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안다면, 어떤 사람도 뒤따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복종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때는 존중도 경멸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 

미워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으며, 화내지 않고, 그가 하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간섭하고 싶어하지 않고, 

비난함이 없이, 비교함이 없이 사랑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까? 

사랑이 있는 곳에 비교가 있습니까? 

누군가를 자기의 가슴을, 온 마음으로, 온 몸으로, 자기의 존재 전체로 사랑할 때, 비교가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그 사랑에 통째로 주어버릴 때 다른 쪽은 없습니다.



사랑은 책임과 의무를 갖습니까? 

여러분이 무언가를 의무적으로 할 때 그 속에 어떤 사랑이 들어 있습니까? 

의무 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인간존재가 붙들려 있는 의무구조는 그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의무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무언가를 하도록 강제되는 한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는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을 때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죽은 자를 위한 것입니까? 

그 눈물은 자기 연민에 의해 나옵니까, 아니면 한 인간이 살해되었기 때문에 울었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울 때 그것이 사랑입니까? 

자기가 외롭기 때문에, 혼자 남겨져서, 더 이상 힘이 없기 때문에 울고 항상 눈물 속에 지내는 것입니까?

만약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 슬픔이 스스로 만든 것이고, 

슬픔이 사고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슬픔이 시간의 결과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물어볼 때, 여러분은 대답을 듣고 너무 무서워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완전한 천지개벽을 의미할지도 모르고, 가족을 해체시킬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아내나 남편이나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자기가 지은 집을 부셔버릴지도 모르고 

사원 사찰에 절대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알아내고 싶다면 두려움은 사랑이 아니고, 

질투는 사랑이 아니며, 

소유욕과 지배는 사랑이 아니고 

책임과 의무는 사랑이 아니며 

자기연민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받지 않는 고통은 사랑이 아니며, 

겸손이 허영의 반대가 아닌 것처럼, 

사랑은 미움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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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것으로부터의자유


나에게 여러분을 가르칠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실재에 이르는 새로운 철학도, 새로운 체계도, 새로운 통로도 없습니다. 진리로 가는 통로가 없듯이 실재에 이르는 통로도 없습니다. 모든 권위는 어떠한 종류라도, 특히 사고와 이해의 분야에서는 가장 파괴적이며 사악한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을 파멸시키고 추종자들은 지도자들을 파멸시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스승이 되어야 하며 또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가치 있는 것으로,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따르지 않는다면 외롭다고 느끼겠지요. 그렇다면 외로워 보십시오. 왜 외로운 것을 무서워합니까? 그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서 자신이 공허하고 둔하며, 어리석고 추하며, 죄 많고 그리고 불안하고 엉뚱하며, 겉만 번지르르한 구닥다리 실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직면하십시오. 도망치지 마십시오. 도망치는 순간 두려움이 시작됩니다.


왜 우리는 실제적인 사실로부터 도피하려 하는 것일까요?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그래서 죽음이라는 사실을 위장하기 위해 별의별 이론, 희망, 신념들을 발명해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사실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그것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죽는 것은 물론 사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가족을 위해서 두려워하고, 여론을 두려워하고,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안정과 그 외에 수백가지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단순한 사실은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것이지, 두려움의 대상이 이것이나 저것이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직면하지 못할까요? 오직 현재 속에서만 어떤 사실을 직면할 수 있는데, 항상 그것을 회피하기 때문에 그것이 눈앞에 있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면, 여러부은 결코 그것을 직면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들은 전반적인 도피의 조직망을 배양해 놓았기 때문에 도피의 습성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감수성을 갖고, 조금이라도 진지하다면 자신의 제약 상태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초래하는 위험, 그것이 어떤 잔인성과 증오감으로 이끄는가를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받는 제약의 위험성을 알게 되었다면 왜 행동하지 못합니까? 게을러서, 즉 에너지가 없어서인가요? 그러나 만일 길을 가다가 뱀을 만나거나 낭떠러지, 화재 같은 육체적 위험을 느낀다면 에너지가 결핍되지는 않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제약에 대한 위험을 볼 때는 왜 그걿게 행동하지 못합니까? 민족주의가 자신의 안전에 위험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왜 행동하지 않는 것인가요?


대답은 여러분이 그 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적인 분석과정을 통해서 민족주의가 자멸로 이끈다는 것을 알 수 도 있지만 그 속에는 감성적인 알맹이가 없습니다. 감성적인 알맹이가 있을 때에만 여러분은 활기차게 됩니다.


폭력은 단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카로운 말을 쓸 때, 어떤 사람을 무시하는 몸짓을 할 때,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복종할 때 나타나는 폭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사회나 나라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조직화된 살해가 아닙니다. 폭력은 훨씬 더 미묘하고 훨씬 더 심층적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인도인 또는 무슬림 또는 기독교인 또는 유럽인, 또는 다른 어떤 사람이라고 부를 때, 여러분은 폭력적이 됩니다. 왜 그것이 폭력적인지 아십니까? 스스로를 나머지 인류로부터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신앙에 의하여, 국적에 의하여, 전통에 의하여 분리시킬 때, 그것은 폭력을 낳습니다. 그래서 폭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떤 나라에도, 어떤 종교에도, 어떤 정당이나 분파적인 체제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류의 총체적 이해에 관심을 둡니다.


폭력의 가장 일반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는 화내는 것입니다. 내 아내나 누이를 공격하면서 우리는 내가 정당하게 화를 낸다고 말합니다. 내 나라가, 내 생각들이, 내 원칙들이, 내 생활 방식이 공격받을 때, 화내는 것이 정당합니다. 나는 또한 내 습성이나 나의 사소한 견해들이 공격당할 때 화가 납니다. 누가 내 발가락을 밟거나 나를 모욕할 때 화를 내고, 또는 누가 나의 아내와 달아나서 내가 질투할 때 그 질투는 올바른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아내가 내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화는 도덕적으로 정당화됩니다. 또 내 나라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일 또한 정당화됩니다. 우리가 폭력의 일부인 화에 대해서 이야기할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취향과 환경적인 추셍 따라서 정당하거나 정당하지 않은 화로 나누어서 화를 말하면서 화를 바라봅니까, 아니면 우리가 오직 화만을 봅니까?  올바른 화라는 것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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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신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인간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발명해 냈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그대는 무엇을 필요로 하든 그 필요에 합당한 종류의 신을 만들어낸다. 

그런 까닭에 신에 대한 개념이 계속 바뀌는 것이다. 나라마다 신에 대한 개념이 다른 것도 이유가 있다. 

나라마다 필요로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신에 대해 다른 개념을 갖고 있다. 

개인마다 충족시켜야 하는 욕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심리적 욕구의 투영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그들의 꿈이고 희망사항이며 욕망일 뿐이지 실체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이 신을 믿는 이유는 신앙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이 위안을 주기 때문에 그들은 신을 믿는다.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얻기 위해 그들은 신을 믿는다. 이것은 그들의 꿈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도움을 준다. 

이 어둡고 불안한 세상에 신앙마저 없다면 그들은 홀로 버림받은 것 같은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신은 그들의 신일 뿐이지 실체의 신성함과 아무 상관도 없다. 



당신은 종교적이란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사원의 종소리, 또는 푸자의식, 승려들의 의식 절차, 그 밖의 온갖 제례의 넌센스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종교적이란 실재에 예민한 것이다. 

당신의 전 존재가 아름다움과 추함에 다 같이 예민한 것이다. 

말뚝에 매인 당나귀, 가난함과 도시의 더러움, 웃음과 눈물, 당신 주변의 모든 것에 날카로와지는 것이다. 

존 존재에 대한 이 예민함으로부터 선량함과 사랑이 샘솟는다. 

그리고 이 예민함 없이는 당신이 재주가 있고, 잘 차려입고, 비싼 차를 타고 다니고, 빈틈없이 깨끗하다 하더라도 아름다움이 없다.




종교적인 마음은 종교를 믿는 마음과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일 수 없으면서, 여전히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불교도일 수 있다. 

종교적인 마음은 결코 추구하지 않으며, 진리를 체험할 수도 없다. 

진리는 우리의 쾌락이나 고통에 의해, 

혹은 힌두교도나 우리가 속한 무슨 종교에 따른 우리의 조건화에 의해 떠받들여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마음이란 두려움이 없고 따라서 어떤한 믿음도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단지 있는 그대로의 그것이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현재 상태의 종교는 전혀 타당성이 없는 특수 현상이 되어있다. 

지난 2000년 동안 크리스천은 믿음을 가지게끔 조건화되었다. 

부디 당신 안을 들여다 보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다만 관찰하기만 하라,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일상을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 

크리스천으로서나 공산주의자로서나 무신론자로서 조건화된 실상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두 자기 시대의 문화에 의해, 사회에 의해, 선전이라는 특수과정에 의해 조건화되어 있다.



오늘날 세계 각 처의 종교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즐거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교회나 절간이나 사원에 다닌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슬픔, 혼란, 미움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정말 진지한 사람이라면, 실존이라고 부르는 이 무서운 것 이상의 무엇이 있는지를 정말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도그마에서, 믿음에서, 선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그는 그가 '종교인' 이 되기 위해 교육받은 구조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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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관하여


세게를 여기저기 여행해 보면 인간 본성이 얼마나 똑같은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대학에서 그렇습니다. 

대학에서는 마치 모형처럼 주요 관심사가 안전을 찾거나, 중요한 인물이 되거나 

또는 가능한 한 생각은 적게 하면서 좋은 시간을 갖는 인간형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재래식 교육은 독립적 사고를 극히 어렵게 만듭니다. 

획일적 사고는 평범한 인간을 낳을 뿐입니다. 

집단과 다르게 되거나 환경에 저항하는 것은 성공을 숭배하는 한 쉽지 않고 때로는 모험적입니다. 

물질적인 영역이건 영적인 영역이건 보상의 추구일 뿐인 성공하려는 충동, 

내적이나 외적 안전을 위한 탐색, 

안락에 대한 욕망, 

이 모든 과정은 창조적인 불만을 누르고, 순발성을 종결시키며,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삶의 지성적인 이해를 막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과 가슴이 둔해지기 시작합니다. 

안락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갈등이 가장 적은 삶의 조용한 구석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그 운둔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삶의 두려움, 이러한 투쟁과 새로운 체험의 두려움이 우리 속에서 모험정신을 죽입니다. 

전반적인 양육방식과 교육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회의 기존 양식에 반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권위와 전통을 존경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삶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살고 투쟁하고 있습니까? 

이름을 얻고, 더 좋은 일자리를 얻거나, 더 효율적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더 큰 지배력을 갖기 위하여 교육되고 있다면 

삶은 천박하고 공허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과학자가 되기 위하여, 책과 결혼한 학자가 되기 위하여 또는 지식에 중독된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 교육받고 있다면, 

세계의 파괴와 비참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삶에 더 높고 더 넓은 의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결코 발견하지 못하면 교육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고등교육을 받는다 해도 사고와 감정의 깊은 통합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며 많은 두려움으로 찢겨질 것이고, 

교육이 삶의 통합된 전망을 배양하지 못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축소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성을 갖지 않고 

교육은 이차적인 가치를 강조하여 어떤 분야의 지식에 숙달되도록 만들 뿐입니다. 

비록 지식과 효율성이 필요할지라도 그것을 주로 강조하는 것은 충돌과 혼란으로 이끕니다. 

야심이 동기가 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능률은 사랑에 의하여 고취된 능률입니다. 

사랑은 삶에 대한 통합된 이해를 가져다주는 것으로서, 그것이 없이는 무자비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것이 세계 모든 곳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의 현재 교육은 산업화와 전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주요 목적은 능률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자비한 경쟁과 이 상호 파괴의 기계속에 붙잡혀 있습니다. 

만약 교육이 전쟁으로 이끈다면, 

교육이 세상을 파괴하거나 파괴되도록 우리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실패한 것이 아닙니까?




교육의 기능은 통합되고, 따라서 지혜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학위를 취득하면 지혜롭지는 않지만 기계적으로 능률적이 될지도 모릅니다. 

지혜는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책에도 나오지 않고 영리한 자기방어적인 반응이나 공격적인 주장들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학식 있는 사람보다 더 총명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시험과 학위를 지혜의 평가 기준으로 삼아왔으며 

극히 중요한 인간 문제들을 회피하는 교활한 마음을 계발시켜 왔습니다. 

지혜는 본질적인 것,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지각하는 능력이며, 

그 결과 우리가 단순히 공식에 얽매이거나 슬로건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육은 우리가 국가 및 사회적 장벽들을 강조하는 대신 그것을 허물어뜨리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대감을 낳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교육체제는 우리를 예속적, 기계적이며 무분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육이 지적으로는 우리를 일깨우지만, 

내면적으로는 우리를 불완전하고, 무능력하며, 비창조적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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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관하여


슬픔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단순히 슬픔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념, 판단을 형성해 오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도망, 평가, 두려움이 그것을 몸소 체험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치통을 앓고 있을 때는 그것에 대한 관념들이나 견해들을 형성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끼면서 행동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곧바로 아니면 먼 뒤에라도 하는 행동이 없습니다. 정말로 고통을 당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당하고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라보아야지 도망쳐서는 안됩니다.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까? 

만약 단지 도피하기를 바란다면 알약, 신앙, 설명, 오락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거기에는 불가피하게 의존성, 두려움 등등의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만약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도망가기를 중지하고 판단하지 말고, 선택하지 말고, 그에 대해 깨쳐야 합니다.

슬픔을 관찰하고 그에 대하여 배우고, 슬픔이 갖는 모든 본질적인 복잡한 뒤얽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슬픔에 놀라 겁에 질리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자기연민의 독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슬픔의 이해와 더불어 슬픔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한시간밖에 살 수 없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당신은 외적으로 필요한 것, 당신의 일, 당신의 유언 등등을 정리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가족과 친구들을 함께 불러내서 당신이 그들에게 끼쳤을지도 모를 피해에 대해서 그들의 용서를 요청하거나

그들이 당신에게 했을지도 모를 어떤 피해에 대해서라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에 담은 일들에게, 욕망들에게, 세상에게 완전히 작별을 고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한 시간 동안 가능하다면, 그것은 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날들이나 몇 해 동안에도 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들이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해보십시오, 그러면 알아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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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당신은 아내가 없으면 외로울 것이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 길을 잃은 셈일 것입니다. 

그러니 아내는 당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행복을 위해 아내에게 의존하고 있고, 이 의존상태를 사랑이라 부릅니다. 

당신은 홀로 있기를 두려워합니다. 아내는 당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항상 그대 곁에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아내의 외로움을 은폐합니다. 

그러나 홀로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외로움을 은폐하기 위해 서로를 이용합니다.

우리는 갖가지 방식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관계 속에서 외로움으로부터 도망갑니다. 

이런 관계는 다 의존이 됩니다. 

내가 라디오를 듣는 것은 음악이 나를 즐겁게 해주고,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떼어 놓기 때문입니다. 

책과 지식도 또한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주 편리한 도구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 우리는 의존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가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신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당신은 의존적이 되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대한 두려움에 비례해서 의존은 더욱 강해지며, 도피는 더욱 더 불가결해집니다. 

아내, 책, 라디오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됩니다. 

드디어 도피는 아주 중요한것,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당신은 아내를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방편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아내에게 부착되어 있습니다.

 아내를 소유해야지 잃어버려선 안 됩니다. 그리고 아내가 소유되기를 원합니다. 

아내 역시 당신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피라는 공동의 필요가 있기 때문에 서로를 이용합니다. 

이런 상호이용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실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



사랑은 동일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사고도 아닙니다. 

사랑이 거기에 있을 때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을 때,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대상 사이에 거리가 있을 때만 당신은 사랑을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교류가 있을 때, 사고나, 표상이나, 기억의 재생은 없습니다. 

어떤 차원에서건 영적 교류가 끊어질 때, 사고와 상상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사랑은 마음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질투, 집착, 소유, 결핍, 과거의 회상, 내일에 대한 동경, 슬픔과 걱정 등의 연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 연기는 실제로 불꽃을 꺼버립니다. 

연기가 없을 때만 불꽃이 있습니다. 둘이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둘이 공존한다고 하는 생각은 소원에 불과합니다. 

소원은 사고의 투사이고, 사고는 사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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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관하여


반명제는 명제의 연장입니다. 반대되는 것은 그 자체의 반대의 요소를 포함합니다. 

폭력적인 마음이 그 반대인 비폭력의 이상을 투사합니다. 

그 이상이 그 반대되는 것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상이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 또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으로부터의 회피나 도피가 아닐까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은 분명히 현실에 대한 이해를 늦추는 수단이 되며, 

이 갈등은 당장의 문제를 은폐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문제를 가져다줄 뿐입니다. 

이상은 현실로부터의 놀랍고도 훌륭한 도피가 됩니다. 

집단적인 유토피아처럼 비폭력의 이상동 허구적입니다. 

이뤄져야 하는 것, 이상은 우리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은폐하고 회피하도록 도와줍니다.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보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보상은 정말로 어리석고 야만스러운 것이라 멀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상을 좇는 것은 다른 수준에서 보상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그 또한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상이란 보상이며 마음이 떠올린 가공적인 상태입니다. 

폭력적이고, 유리되고, 자체만을 위해 나서는 마음이란 것이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보상, 

른바 이상, 유토피아, 미래라고 부르는 허구를 투사하고, 그것을 헛되이 추구합니다.


"만일 이상이 허구적이라면, 그것은 저의 모든 생각을 변혁시킬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이상을 추구하는 일이 전혀 무익한 일이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헛된 몸부림이며,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자기기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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